※재작년(2019)에 썼던 글이라 개연성 1도 없음
※카이바 생일에 맞춰서 재작년에 올리려고 했는데 2년이나 지나벟임........
※퇴고따위 하지 않음. 유물 발굴하다가 발견해서 올림
※한마디로 개연성 없구 캐붕 쩔러요 급전개 주의
10월 25일은 카이바 세토의 생일이다. 죠노우치는 1월 25일로 이미 한참 지났다. 사실 사귀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의 생일을 맞았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의 연인에게 과도한(?) 축하선물도 받았다. KC백화점 상품권 5만엔 짜리 두 장. 받자마자 너무 높은 가격에 미쳤냐는 듯이 카이바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고작 이런거 가지고 라는 눈빛으로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에 모쿠바에게 들은 사실이었는데, 그 때 카이바는 죠노우치의 생일선물을 고르기 위해 하루종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 선물 후보는 5만엔 상품권 두 장 정도가 아니었다는 정보도 얻었다. (장난스럽게 ‘차라도 한 대 뽑아주려고 했냐’ 라는 죠노우치의 말에 모쿠바는 그 정도였으면 나도 안말렸다- 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전해듣자 죠노우치는 자신의 선물을 뭐 해줄지 고민하는 그가 상상되어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이제 그의 몫이 되었다. 오늘은 9월 20일이었고 앞으로 생일은 1달 하고도 5일이나 남아있었다. 누가 듣는다면 왜 이렇게 오래 전부터 고민하냐고 물을 수도 있을 만큼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하지만 죠노우치 생각은 달랐다. 사귀고 난 후 처음 맞는 그의 생일이었다. 크고 화려하게는 해주지 못하더라도 기억에 남는 생일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골똘히 생각을 해봐도 마땅히 생각나는게 없었다. 카이바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도, 그 카이바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인물도 아니었거니와 뭘 주던지 식상할 것 같았다. 그 생각에 죠노우치는 아침부터 한숨을 폭폭 쉬어댔다.
“죠노우치 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점심시간 때,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무토 유우기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점심시간이 된지 꽤 지난 시간이었고 다른 친구들은 매점에 가거나 밖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교실에는 둘 뿐이었다. 매점에서 사온 두 개의 빵 봉지 중에 하나를 뜯던 죠노우치가 순간 멈칫하며 유우기를 바라보았다. 유우기는 눈을 두 어번 깜빡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유우기는 사람의 분위기를 읽을줄 알았다.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좋은지 나쁜지. 아니면 걱정거리가 있다던지. 아주 작은 변화도 눈치채는 친구였기에 죠노우치도 이전에 여러번 기분을 간파당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기분 나빴겠지만 친구라 그런지 오히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느낌이라 우정이 두터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친구도 몇 안될 것이다.
죠노우치는, 유우기에게 거짓말은 왠만하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의 그 보라색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자면 거짓말을 할 생각이 쏙 들어갔다. 죠노우치는 대충 얼버무릴 생각이었으나 그의 눈을 보자마자 멋쩍게 웃어버렸다. 누가 봐도 고민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유우기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말해봐, 죠노우치 군. 나도 같이 들어줄게.”
“아, 조금 부끄러운데... 비웃지마, 유우기.”
절대 비웃지 않을게. 주먹까지 쥐어보이며 약속하는 친구를 보며 죠노우치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 부끄럽지만 나름 풋풋한 고민을 말하기 시작했다.
유우기의 첫 번째 반응은 웃음이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하는 친구가 귀여워서 나는 웃음이었다. 연인의 생일에 어떤 것을 해줄지 고민이라니. 심각한 고민이 아닌것에 유우기는 안도했다. 아침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서 또 집안 문제인 줄 알고 마음이 철렁했었는데 카이바 군의 선물이 고민거리였다. 유우기는 죠노우치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보니 분명 죠노우치의 표정은 고민이 많은 모습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설레이는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작게 얼굴을 붉히는 그에게 유우기는 자신도 같이 고민해주겠노라 약속했다. 그 말에 죠노우치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연인이 좋아할만한 선물은 안즈가 잘 알지 않을까?”
“하지만 안즈 걔는 여자잖아. 여자가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랑 남자가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다를걸.”
“으응... 그럴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안즈가 좀 더 세심할 것 같아서.”
“뭐어?? 죠노우치 너 누구한테 선물주게??”
으왁!! 죠노우치는 그대로 놀라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다행히 그 전에 혼다가 의자를 붙잡아주어 땅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매점에서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사와 돌아온 친구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안즈는 아직 놀란 마음을 추스리는 죠노우치를 보며 놀리듯 말을 꺼냈다. 선물의 주인공은 설마~? 키득거리며 웃는 그녀를 한 번 노려본 죠노우치는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저 상태라면 아마 하교할 때까지 놀릴 것이었다. 안즈 특유의 놀림은 어떤 때엔 혼다보다 심했다. 혼다야 한번 세게 놀리고 끝이었지만 안즈는 오랫동안 은근히 꺼내며 놀렸으니까 어쩌면 이 쪽이 더 피곤하다.
“그래. 1달 뒤에 카이바 생일이야.”
체념한 듯 죠노우치가 턱을 괴고 입술을 삐죽였다. 유우기에게만 말하려던 비밀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면 분명히 비웃거나 놀려댈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건만, 이렇게 들킬줄은 몰랐다. 혼다가 죠노우치의 목에 팔을 걸고 장난을 쳤고 오토기도 등을 팡팡 때리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이럴 줄 알았지. 죠노우치는 역으로 혼다에게 헤드락을 걸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즈가 죠노우치의 앞에 의자를 가져오며 앉았다. 아직까지 점심시간은 20여 분이 남아있었다. 죠노우치 또한 둘이서만 고민하는 것 보단 여럿이서 고민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안즈는 죠노우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평소에 잘 하고 다니는 건 무엇인지. 어떤 걸 할 때 가장 기분 좋아보이는지.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지. 기타 등등... 안즈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던 죠노우치는 더더욱 미궁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카이바는 시간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항상 왼손에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다. 듀얼 할 때는 듀얼디스크를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빼놓고 다녔지만 평소 입는 정장에 시계는 필수였다. 그렇다고 자신은 시계를 사줄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카이바가 갖고 있는 시계가 훨씬 좋고 정확한 시계일 것이다. 괜히 싼거 선물했다가 구석에 처박힐 바에야 -평소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그러지는 않을 것 같지만- 처음부터 주지 않는게 나았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었다. 굳이 뽑자면 듀얼이었다. 죠노우치가 카이바에게 초희귀레어카드를 선물해줄 수 있는 실력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카드를 죠노우치가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카드를 구하지 못할 카이바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사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카이바의 생일날 선물을 신경쓰는건 당연했지만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 그 때 카이바랑 300일인데.”
뭐라고??? 주변 친구들이 경악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머 하고 안즈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죠노우치가 더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벌써 300일이구나.”
“으응... 12월 말부터 사귀었으니까.”
“그럼 그 때 카이바 군도 뭔가를 준비하지 않을까?”
“난 계속 받기만 했다고. 이번에는 내가 주고 싶어.”
단호한 그의 대답에 친구들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이때까지 있었던 모든 기념일에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많은 것을 준 것은 사실이다. 죠노우치 생일이야 당연히 카이바 쪽에서 선물을 주고 싶어 하였다. 100일이나 200일 기념일 때도 카이바가 일방적으로 죠노우치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는 부담스럽다며 거절했지만 이 때 아니면 언제 받냐는 말에 말문이 막혀 받았었다. 죠노우치도 기념일에 그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지만 사정상 여건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올해 약 반년 동안은 죠노우치가 꽤나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가 또 빚을 졌다.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지 1주일만에 일어난 일이다. 거의 다 갚아가던 빚은 또 다시 불어났다. 정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빚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이때까지 아버지가 져왔던 빚 보다는 적은 액수라는 것이지, 결코 만만하게 볼 액수는 아니다. 죠노우치는 그 빚을 또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뛰어야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쓰러지다 싶이 잠을 자고 하교 후부터 새벽 5시까지 일을 하다보니, 체력 빼면 시체였던 죠노우치도 점점 지쳐갔다. 오랜만에 카이바가 학교에 등교를 해도 점심시간 이후 짧게 만나며 이야기를 나눌 뿐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방과 후에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서둘러 하교해버리니 만날 시간은 더더욱 줄었다. 보다못한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그 빚을 자기가 다 갚겠다고 했지만 죠노우치가 크게 화를 내며 절대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것 때문에 이틀 정도를 거하게 싸웠다.
‘쓸데 없는 고집은 그만 부려라, 범골!’
‘너야말로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 반갑지 않으니까!’
‘내가 하는 참견이 쓸데없나? 이건 연인이라면 당연히 걱정되는 문제다.’
‘걱정해주는건 고맙지만 이건 내 사정이야.’
카이바는 거절하는 죠노우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죠노우치는 자신의 가정사에 참견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싸웠지만 결국 카이바가 두 손을 들며 항복했다. 카이바 만큼, 죠노우치도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죠노우치는 집에 고이 모셔져있는 정장과 (KC 연회 파티때 입으라며 사주었다.) 고급 시계, 고급 향수를 떠올렸다. 시계는 차면 닳을까 싶어 케이스에 보관하며 매일 먼지를 닦아주고 있었고 향수는 쓰면 없어질까 아까워 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장은 아직 입을 일이 없으니 패스하자. 카이바가 그 선물들을 줄 때 죠노우치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네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연인이 되게 하지 마라.’ 라며 못을 박았다. 물론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죠노우치는 힘든 시기에 향수와 시계를 보며 힘을 낼 수 있었다.
“너는 어떤 선물을 주고 싶은데?”
혼다가 물었다.
“…글쎄. 보면 나를 떠올릴 수 있는 선물?”
“죠노우치 주제에 어려운 생각하지 말라고...”
“정성을 다해 만든 쿠키... 그런건 안되겠네. 먹으면 없어지니까.”
어느 새 오토기와 바쿠라도 합세하여 머리를 말이었다. 안즈가 바쿠라에게 넌 항상 먹을거냐- 라고 작게 웃었지만 죠노우치는 지금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죠노우치가 선물을 보며 카이바랑 떠올리듯이 선물을 받은 카이바가 그 물건을 보며 자신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선물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죠노우치는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카이바 성격 상 절대 못할 것 같았던 편지도 -비록 2줄 적혀있었지만- 한 통 있는 것을 생각해낸 죠노우치는 짧게나마 카드편지를 써주어야겠다 생각했다.
어느 덧 시간이 지나 아무런 묘안도 떠올리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같이 고민해주겠다고 친구들은 말해주었다. 그것 만으로도 죠노우치는 충분히 고마웠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책을 펴 턱을 괴었다. 이제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은지 오래다. 여름방학 때 정말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한 결과 그 빚도 거의 갚았기 때문이었다. 죠노우치는 그만큼 빚을 상환한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집을 당장이라도 뛰쳐나갔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조금이라도 변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계속 기대를 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밖에 나가있던 다른 반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종이 울릴테니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죠노우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빈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창가쪽에 자리하고 있는 빈 자리는 그의 연인의 자리였다. 학교에 안나온지 오래다. 방학하기 하루 전에 잠시 나오고 그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방학 때는 카이바도 바빴지만 죠노우치의 아르바이트 때문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자기 전 잠시 통화하는게 다였다. 보고싶다. 죠노우치는 책상에 엎드려 주인을 기다리는 빈 자리를 쳐다보았다.
“이거 봐, 어때?”
“와! 뭐야 뭐야? 남자친구한테서 받은거야?”
“응. 200일 기념으로 선물 받았어.”
200일 선물? 죠노우치는 200일 선물이라는 단어에 귀가 번쩍 하고 띄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는 여학우 두 명이었다. 죠노우치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행동하며 이야기를 엿들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던 죠노우치의 표정이 조금은 환해졌다.
“나 먼저 간다.”
“어? 죠노우치 군, 오늘 같이 게임샵 가지 않을래?”
“아, 미안 유우기. 오늘부터 아르바이트 다시 하기로 했어.”
1주일 후, 하교하려는 죠노우치에게 유우기가 오랜만에 게임샵에 들르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죠노우치는 가방을 급히 싸며 거절했다. 아르바이트. 유우기는 그 말을 듣자 걱정부터 앞서기 시작했다. 절친한 친구로써, 지난 반년 간 죠노우치가 어째서 그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가 허용되지 않는 도미노 고교에서도 유일하게 허용되는 사람이 바로 죠노우치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걱정스러운 유우기의 표정을 본 것인지 죠노우치가 그의 어깨를 탕탕 치며 웃었다.
“걱정마. 빚 때문에 그러는거 아니니까. 이건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하는거야.”
빚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죠노우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유우기는 안심할 수 있었다. 죠노우치는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두 사람 사이에는 있었다. 유우기는 짐작가는 일이 하나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드디어 선물을 고른거구나 라고 생각하며, 죠노우치에게 미소지었다. 무슨 선물을 골랐는지 궁금했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 말해줄 터였다. 유우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급히 하교하는 죠노우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이바 군은 좋겠네.
노을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10월 25일은 토요일이었다. 정말정말 좋은 일이었다. 만약 카이바의 생일이 토요일도, 일요일도 아닌 평일이었다면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친 후에야 만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저녁먹고 바로 헤어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0월 25일이 토요일이라니. 죠노우치는 이건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신은 믿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죠노우치가 오늘의 날짜에 빨간 색으로 X표시를 그었다. 내일만 지나면 그의 생일이었다. 얼굴을 볼 수 있었다. KC는 현재 새로운 버츄얼 시스템을 개발중에 있었기에 카이바는 너무나도 바쁜 상황이었다. 매일마다 하던 전화도 점점 짧아졌다. 죠노우치는 그에 화가 나는 대신 조금 걱정되었다. 카이바는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피로와 갈라짐은 숨길 수 없었다. 어제는 통화를 거니 카이바 대신 모쿠바가 받았었다. 시스템을 거의 최종적으로 마친 후 사장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잠들었다고, 모쿠바가 전해주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쿠바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도 쌩쌩한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아 서둘러 전화를 끊게 하였다. 오늘은 통화 되려나?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찰나, 평소에는 거의 커다란 시계로 활용하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그토록 보고싶은 연인이었다. 죠노우치는 서둘러 통화연결 화면을 터치했다.
“카이바??”
[범골, 아직 안자고 있었나?]
전화를 받을 줄 몰랐다는 듯 말하는 그의 말에, 죠노우치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 반.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으응, 아직 잠이 안와서. 네 전화 기다리기도 했고.”
[그랬군. 어제는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아, 아니!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모쿠바가 잘 말해주기도 했고…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말한 죠노우치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니. 이런 낯간지러운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그는 보이지도 않을텐데 입을 손으로 막았다. 통화 상이라서 자신의 빨개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동안 침묵이 유지되다가 곧이어 하하 하고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죠노우치가 가장 좋아하는 카이바의 웃음소리다. 그리고 ‘나도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죠노우치는 심장이 간질간질 해지는 기분이 들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 문질렀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카이바와 죠노우치는 30분 가량 통화를 하였다. 새벽이었기에, 죠노우치는 아침에 학교를 가야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통화할 수 없었다. 카이바는 이제 곧 출시될 새로운 버츄얼 시스템 게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듀얼과는 다른, KC 자체적으로 발명한 게임이었다. 지금은 다른 게임에 적용시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듀얼에도 적용시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 때가 되면 일도 줄어들테니, 같이 듀얼이나 하자고 말해오는 그에게 죠노우치는 꼭 그러자며 약속을 받아냈다. 죠노우치는 그냥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을 말해주었다. 유우기나 다른 친구들과 놀러간 일 등을 말하다가 저번에 듀얼을 했을 때 유우기에게 비겼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카이바는 범골 듀얼리스트에서 듀얼리스트로 승격시켜주겠다고 응대해 죠노우치의 화를 돋구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전화를 끊어야할 즈음 죠노우치는 더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카이바의 목소리가 점점 잠기는 것을 알아차려 더 이상은 어리광 부릴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끊어야할 것 같아 말을 정리하려고 죠노우치가 카이바에게 물었다.
“저, 카이바.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날 수 있어?”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토요일에 일정이 잡혀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애초에 서로 이 날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 카이바는 무척이나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감안해야했다. 짧은 텀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그는 괜스레 긴장되었다.
이번 주 토요일. 카이바는 죠노우치에게서 들은 요일을 듣자마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불현듯 떠오른 사실에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원래 전화를 걸어 말하고 싶었던 본래의 용건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통화하며 목소리를 듣다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늦은 시간 죠노우치가 전화를 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아 놀라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받던 전화를 왼손으로 고쳐잡은 후 메모지를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카이바?]
“그래. 이번 주 토요일, 당연히 만나야지.”
[정말? 시간 괜찮은거야?]
그래. 짧은 긍정의 말에 죠노우치는 정말 기뻐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하이톤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는게 안봐도 비디오였다. 수화기 너머로 텐션이 업 된 죠노우치의 목소리를 듣자니 카이바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 주 토요일이 무슨 날인지는 카이바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일이자, 죠노우치와 연인이 된지 300일 되는 날이었다. 핸드폰에 죠노우치가 깔아둔 어플 중 하나인 날짜를 세주는 어플이, 잠금화면을 해제하면 바로 나타났기 때문에 사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카이바는 잠시 휴대폰을 얼굴에서 떼어 화면을 확인했다. +299♥️ 라고 적혀있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숫자 뒤에 붙어있는 하트는 죠노우치가 붙인 것이었다. 원래 성격의 카이바였다면 당장에 하트를 지우라고 닦달했을 테지만 저 하트를 붙일 때의 죠노우치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보여 차마 지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 핸드폰 화면을 보던 모쿠바가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의 표정을 그도 보았어야 했다.
사실 토요일에는 이 것 말고도 하나 더 해야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전화를 건 것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내일 말해야할 것 같았다.
“자세한 약속은 내일 잡지. 지금부터라도 자지 않으면 아침에 등교에 영향이 있을거다.”
[응? 응응! 알았어! 너도 푹 쉬고, 우리 나중에 또 통화하자!]
죠노우치는 토요일 카이바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지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밝게 웃었다. 카이바는 지금 그의 표정은 보지 못하지만 어느정도는 상상가는 듯 작게 미소지었다. 잘 자라는 마지막 인사를 한 다음에, 비로소 통화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카이바는 통화를 종료한 다음 의자에 기대어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지만 마지막 마무리가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는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원래는 모쿠바에게만 허용되는 미소였지만 이제는 허용범위가 한 사람 더 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였다. 연애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딱 그 말이 자신에게 맞는 말이었다.
카이바는 메모지에 적어둔 일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하였다. 죠노우치는 이제 아버지의 빚을 거의 다 갚은 상태라고 했다. 그럼 그의 성격 상 이번 300일 기념일이자 생일인 10월 25일에 아무것도 안할 리가 없었다.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카이바는 자신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하는 연인이 정말 귀여웠다. 그렇기에 이번 만큼은 받아주기만 할까 했지만 또 그러기에는 카이바 성격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 자두었다가, 날이 밝으면 이소노에게 스케줄을 좀 조절해달라고 할 생각을 하며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몸은 정말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말똥 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잡은 약속이라 그런지 설레여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죠노우치도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죠노우치는 나가기 전 옷매무새를 체크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데이트를 했었지만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첫 데이트 마냥 떨리기만 하였다. 그는 평소에는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는, 선물받은 향수를 뿌렸다. 카이바가 선물해준 것이니, 그도 향을 알고있을 것이다.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향은 너무 독하지도, 그렇다고 연하지도 않은 시원한 향이었다. 오히려 카이바에게 더 잘 어울릴 법한 향이었는데 한번 뿌리고 등교한 날 안즈가 자신과 정말 잘 어울린다며 칭찬해주었다. 죠노우치는 시계를 찰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왼쪽 손목에 끼운 후 똑 소리를 내며 시계 클러치를 닫았다. 한 번도 시계를 차본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의 왼쪽 손목은 꽤나 어색했다.
가방을 챙기고 죠노우치가 정말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산 선물까지 가방 안에 넣었다. 어제 정성을 다해(?) 적은 편지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제 안즈네 집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만든 케이크도 확인했다. 빠진건 없는지 두 세번 더 체크한 다음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KC 본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다른 곳에서 만났겠지만 오늘은 KC 본사에서 만난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어제 카이바에 의하면 오늘까지 올라와야 할 서류가 올라오지 않아, 부득이하게 내일 아침에 처리해야한다 라고 했다. 죠노우치는 사실 상관 없었는데 그 쪽은 그게 어지간히 신경쓰인 모양이었다. 죠노우치는 그 때 카이바에게서 두 번째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까지 올라온 죠노우치는 저 멀리 문이 보이는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에서 익숙한 비서가 나와 맞이하자, 비서의 어깨 너머에서 안경을 낀 채 서류를 처리중인 카이바 세토가 보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체면이 체면인지라 아무 말 하지 않고 사장실에 들어가 가만히 서있었다. 서류를 작성하던 그가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눈동자를 굴려 정면을 쳐다보다가, 이내 눈이 마주치자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그 미소에 죠노우치는 멍하니 서있다가 이내 마주 웃어주고는 손을 작게 흔들었다. 아, 잘생겼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빛이 났다.
완성시킨 서류를 프린트하고 서명까지 하자 모든 일이 끝난 듯 보였다. 서류철을 가지고 비서가 나가자 큰 사장실에 드디어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은 눈치가 보여 쭈뼛쭈뼛 서있는 그에게 카이바가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제서야 죠노우치는 케이크상자를 놔두고 카이바에게 달려갈 수 있었다.
“카이바-!!”
“흠. 어지간히 보고 싶었나 보군.”
카이바에게 폭 안긴 죠노우치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를 단단히 안은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보고싶었던건, 카이바도 마찬가지였다.
“생일 축하해, 카이바! 진짜 진짜 보고싶었어.”
“……흥.”
조금은 직설적인 마음고백에 카이바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원래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떤 감정인지는 숨기기 어려웠다. 카이바는 부끄러울 때 귀가 빨개지는 타입이었다. 그걸 잘 알고있는 죠노우치는 빨개지는 귀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걸 보면 정말 귀엽다. 떨어지기 싫었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품은 정말 따뜻했다. 이윽고 카이바가 안고있던 팔을 풀었다. 그는 죠노우치의 목 주변에 코를 가져다대고 숨을 짧게 두어번 들이켰다. 저번에 자신이 선물해준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코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다고 신경을 좀 쓴 모양이었다. 자신이 골랐지만 향수는 죠노우치와 정말 잘 어울렸다. 향수를 고를 때 거의 한 시간을 고민했다는 사실은, 모쿠바만 알고 있는 일이자 죠노우치에게 말하지 않은 유일한 비밀이다.
“아, 그리고 이거! 내가 직접 만든거야.”
“음?”
죠노우치는 잠시 내려놓았던 케이크상자를 들어 카이바에게 건네주었다. 카이바는 케이크상자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케이크를 꺼내보았다. 이내 카이바의 눈이 드물게 동그래졌다. 케이크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였다. 카이바가 놀란건 생크림케이크 때문이 아니다. 케이크에 장식되어있는, 설탕으로 만든 푸른눈의 백룡 모형때문이었다.
원래, 카이바의 생일에 죠노우치가 직접 케이크를 만들 생각이었다. 죠노우치는 의외로 요리를 잘했다. 어릴 때부터 거의 살림을 혼자 하다싶이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제과제빵과 요리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우선 레시피를 보며 만드는 것에는 결코 실패한 역사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불행한 점이 있다면 죠노우치의 집에는 오븐이 없다는 점이었다. 시즈카 생일때도 오븐이 없어 안즈네 집에서 만들었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안즈에게 부탁을 해야했다. 다음에 안즈에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죠노우치가 요리를 잘 한다는 것은 카이바도 알고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가 만들었다고 가져온 간단한 도시락을 먹어보면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탕공예라니. 물론 세세하게 만들지는 못해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수준급이었다.
“네 녀석이 이런데에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응? 아, 제과점에서 알바 했을 때 사장님이 조금씩 가르쳐주신 적이 있어서.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푸른 눈이랑 비슷하게 생겼지?? 마음에 들어?”
“아아. 그래. 정말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죠노우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씨익 웃었다. 겉은 생크림이지만 빵은 초콜릿 빵이라며 정말 맛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카이바는 평소에는 거의 짓지 않는 미소를 보이며 다시 한번 더 죠노우치의 이마에 짧게 입맞췄다.
-
카이바는 항상 입던 정장이 아닌, 일반 와이셔츠와 슬랙스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오전부터 밖에 나가는걸 생각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입고 나온 것이었다. 원래라면 서류 처리가 끝나자마자 밖에 나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자신의 연인과 같이 있을 심산이었다. 원래라면 모쿠바와 계속 함께 있었겠지만 올해에는 다른 사람이 옆에 있고, 그걸 이해해주지 못할 동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쿠바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갖고 싶은건 없냐고, 뭐든 다 구해다 주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모쿠바가 구할 수 있는걸 카이바가 구하지 못할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형의 생일을 챙겨주려는 동생이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형!! 갖고 싶은건 생각했어?”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모쿠바를 생각하자마자 사장실 문이 열리며 동생이 들어왔다. 저보다 5살 어린 남동생 이었고 아직 제 눈에는 어리기만 한 꼬마였지만 그래도 어엿한 부사장 이었다. 성장기라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크는 동생을 보는 낙으로 살아가는 카이바였다.
모쿠바는 카이바에게 다가가려다, 이미 사장실에 들어와 있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달려갔다. 죠노우치-! 하고 허리를 감싸안으며 폭 안긴 모쿠바는 14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귀여웠다. 키가 자라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죠노우치보다 한참 작아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모쿠바가 아무런 허물 없이 대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그 중 한 명이 죠노우치였다. 형의 연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둘은 꽤 친했다.
“오! 오랜만이다, 모쿠바! 잘 지냈냐?”
“당연하지!! 죠노우치도 잘 지낸 것 같은데?”
“나도 무척이나 잘 지냈지! 마침 잘 됐다. 케이크 먹으려고 너도 부를 생각이었는데.”
케이크? 모쿠바가 고개를 들어 죠노우치를 쳐다보다가 이내 책상 위에 놓인 케이크를 발견했다.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때 지은 표정이, 카이바와 너무 닮아 죠노우치는 작게 웃고 말았다. 성격이나 생김새는 언뜻 보면 정말 닮은 구석 하나 없는 형제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형제가 맞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먹기 아까웠지만 케이크는 사람이 먹으라고 만든 음식이기에 죠노우치는 아낌없이 잘라 나눠 먹었다. 카이바의 비서인 이소노에게도 나눠주었다. 케이크는 원래 냉장고에 놔뒀다가 나중이 먹을 생각이었지만 모쿠바도 마침 오고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 먹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케이크를 먹는 중간중간 계속 사장실로 무언가가 배달되어 왔지만 비서들이 정리만 할 뿐 카이바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죠노우치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필요한 물품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죠노우치, 오늘 연회 올거지?”
“연회? 아, 당연하지. 어제 카이바 한테서 들었어.”
모쿠바가 죠노우치에게 물었다. 연회. 카이바가 이틀 전 죠노우치에게 전하려고 했던 용건이 바로 이 것이었다. KC는 새로운 시스템이나 듀얼시스템이 나오면 행사를 치르는 김에 연회를 열었다. 크든 작든 무조건 열었다. KC 만의 관례같은거라고 생각했었다. 죠노우치도 카이바의 초대를 받아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작은 규모가 아닐 터였다. 새로 개발한 버츄얼 시스템은 일루전 사와 계약을 맺어 듀얼에도 적용할 계획이 있었고, 이 시스템은 KC의 독자기술이기 때문에 다른 기업에서 이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이용료를 내야했다. 그렇기에 이번 새로운 시스템은 결코 작은 아이템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번 연회 규모도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게다가 카이바의 생일까지 겹쳐 그를 축하하기 위한 행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카이바는 화려한 남자였지만, 정작 화려한 일은 싫어했다. 돈을 아끼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필요없는 물품을 과시용으로 사지는 않았다. 예시로, 지금 죠노우치가 있는 사장실만 하더라도 딱 필요한 가구가 끝이었다. 예전에 고자부로가 정말 쓸모없고 비싸기만 한 도자기나 그림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사 모았던 것과는 매우 극과 극인 셈이다. -그 과시용 물품들은 카이바가 사장이 되면서부터 싸그리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카이바는 연회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연회를 할 시간에 새로운 듀얼디스크를 개발하는것이 더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회 또한 뺄 수 없었고 연회에 죠노우치를 초대한 것이었다.
“저녁 전까지는 들어오마. 그때까지 부탁한다 모쿠바.”
“당연하지, 나한테 맡겨둬! 나가서 오랜만에 재밌게 놀고와. 형, 이번 기획때문에 쉬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모쿠바의 얼굴에서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정말 서로 죽고 못사는 형제다. 가끔은 둘 사이가 질투날 정도로 부럽기도 했었다. 갑자기 시즈카가 보고싶네. 죠노우치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몇달 만에 단 둘이서, 그것도 카이바의 생일날 하는 데이트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죠노우치는 오늘을 위해 알바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칼로 잰 듯한 코스로 카이바를 데리고 다녔다. 카이바는 아마 모를테지만 죠노우치는 어제까지 안즈나 유우기한테 괜찮은 데이트 코스를 계속해서 물어보고 다녔다. 그 결과로 엄선하고 엄선하여 뽑아낸 곳으로 돌아다니는 중인 것이다. 보통 연인들에게는 정말 기본적인 데이트일지도 몰랐지만 둘은 그런 데이트를 할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날은 정말 특별했다. 이제껏 데이트라고 해봤자, KC 앞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카이바 저택으로 가 저녁을 함께 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죠노우치가 걱정했던 점은, 카이바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람이었고 메스컴에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될까봐, 그래서 카이바가 좋아하지 않을까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기우라는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둘은 사람들이 많은 시내에서 아주 잘 돌아다녔다. 카이바는 안경 하나 쓰고 있었는데 -요즘 눈이 나빠져 끼고 다닌다고 했다- 사람들은 카이바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카이바는 처음 나온 시내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옆에서 익숙하게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죠노우치를 보고 있자니 이런 데이트도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시내 가운데에 있는 공터애서 꽃축제가 열려 그 곳에서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였고 유우기가 추천해준 게임랜드에 들어가 둘이서 열심히 게임을 하며 열을 올리기도 했다. 오히려 죠노우치가 카이바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가 생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카이바는 오랜만에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망했다.
죠노우치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연회가 시작될 시간이 다 되어서 모쿠바가 차를 보내 타고가는 중이었다. 죠노우치는 카이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표정을 알리 없는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기분좋은 촉감을 즐겼다.
물론 오늘 데이트는 만족스러웠다. 죠노우치가 카이바와 하고 싶었던 일은 거의 다 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바가 즐거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보여준 미소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죠노우치도 그정도 쯤은 구별할 줄 알았다. 문제는 데이트가 아니었다.
죠노우치는 자신의 가방 안에서 아직도 건네주지 못한 선물상자를 확인했다. 분명 점심을 같이 먹는 도중에 타이밍을 잡아 전해주려 했는데, 한번 실패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좋은 순간을 다 놓쳐버린 것이었다. 또 꽃축제에서 전해주려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뭔가 공개청혼(?) 같아서 포기했고, 한적한 가로수길을 걸으며 적절한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전해주려 했는데, 하필 그 때 카이바에게 전화가 걸려와 실패했다. 이 다음에는 연회였다. 연회는 아무래도 카이바가 중심이 되다보니 매우 바쁠 것이다. 연인과 함께 하는 자리라고 해도 유명인사가 많이 올텐데 카이바가 죠노우치하고만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유우기와 바쿠라도 초대했다’ 라고 귀띔해준 것을 보아 카이바 또한 죠노우치가 혼자 남을수도 있을 상황을 대비한 것 같았다. 유우기는 이해되지만 왜 바쿠라도 초대했냐는 질문에 바쿠라는 배틀시티 8위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배틀시티 8인은 다 초대한 것 같았다. 연회는 카이바 저택이었다.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준비중이었다. 아직 시작되려면 1시간은 있어야했기에 죠노우치도 얼른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다. 넓고 넓은 카이바 저택 마당이 거의 꽉 찰 정도로 많이 왔다. 흰 테이블이 세팅되고 그 위에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찼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카이바는, 즐겨입는 하얀 정장에 푸른 넥타이를 메고 있었다. 평소 때 입는 일반 정장도 좋았지만 죠노우치는 저 하얀 정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카이바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정장에 빼꼼 튀어나온 행거칩도 청명한 하늘색이었다. 멍하니 카이바를 바라보고만 있자, 카이바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죠노우치 앞에서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정신 차려라, 범골. 죠노우치의 콧잔등을 가볍게 톡톡 쳤다.
“넌 하얀색이 정말 잘 어울려.”
“…그런가.”
응응. 죠노우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모습에 카이바는 작게 웃더니 자켓 안에서 빨간 손수건을 꺼냈다. 왠 손수건이지 싶었지만 이내 카이바는 능숙하게 접더니 죠노우치의 앞주머니에 살며시 넣었다. 행거칩이었다. 정장에는 이게 빠질 수 없지. 카이바는 행거칩을 톡톡 치며 눈을 살짝 접어 웃었다. 모쿠바에게만 보여주던 다정한 미소였지만 이제는 죠노우치도 그런 미소를 가끔 보고는 했다. 그 미소에 죠노우치는 얼굴이 확 붉어짐을 느꼈다. 언제봐도 카이바가 웃는건 적응되지 않는다. 항상 차가운 표정만 보아와서인가, 미소를 지어줄 때면 예외없이 심장이 쿵쿵 뛴다. 카이바는 그런 죠노우치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연회는 사실 재미없다. 고위층 사람들의 친목도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카이바가 마이크를 잡고 생일을 축하해줘서 고맙다는 아주 간단한 인사를 전하고, KC가 개발한 버츄얼 시스템에 대해 연회를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죠노우치의 예상대로 카이바는 다른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바빴다. 그의 옆에는 모쿠바가 와 있었다. 뒤에는 이소노를 비롯한 세 명의 비서도 서있었다. 몇 달을 고생해서 만들어낸 쾌거였지만 그 이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오늘 연회가 끝나면 제대로 쉬려나. 멀리서 사람들을 만나는 카이바를 보며 죠노우치는 생각했다.
바쿠라와 유우기도 와있어서 사실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힐끔 눈을 돌려 카이바를 바라보았을 때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카이바는 손을 살짝 들어 반응해주었다. 그 행동에 죠노우치 또한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카이바 뒤에서 모쿠바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던건 덤이다.
“헤에… 카이바 군, 바쁘구나.”
“아아. 그렇지, 아무래도. 잘나신 사장님이시니까.”
“오늘 데이트는 어땠어, 죠노우치 군?”
“너랑 안즈 덕분에 진짜 재밌게 놀고 왔다! 고마워, 유우기. 나중에 맛있는거 사줄게.”
유우기는 다행이라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그렸다. 사실 모처럼 데이트 하는 날인데 연회가 잡혀버려 기분이 안좋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다. 하지만 카이바의 성격 상 그 또한 이 연회가 달갑지는 않을 터였고, 그걸 죠노우치도 알고 이해해주었을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고 배려하는 모습이 보여 유우기는 괜스레 기분이 뿌듯했다. 사실 사귄다고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정말 놀랐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예쁘게 사귀고 있어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이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때, 카이바는 죠노우치를 찾는다고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저에게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대꾸만 해주며 연인을 찾는 그의 눈에 저 멀리 유우기와 바쿠라와 함께 있는 죠노우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죠노우치. 그를 부르자, 거리가 꽤 되는데다가 카이바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죠노우치는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이내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드는 그가 보였다. 카이바도 웃으며 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곧 유우기와 뭐라 말을 하다가 이내 자신한테로 다가왔다.
죠노우치가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자리를 피했다. 그제서야 카이바는 표정을 풀고 그의 손을 잡아 어디론가 이끌었다. 죠노우치는 아직 입 안에 남아있는 과일을 우물우물 씹으며 그가 데려가는데로 그대로 끌려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발견한 모쿠바는 곧이어 옆에 서있던 이소노에게 사인을 보냈다.
“카이바, 어디가?”
“네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있다.”
“그게 뭔데?”
“가보면 알아.”
카이바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 능숙하게 맨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저택은 생각보다 매우 높았다. 메이드들이 한 명도 없는 저택 안은 생각보다 썰렁했다. 3층까지 올라가자 그제서야 카이바는 긴 복도를 지나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꽤 깔끔하고 정돈된 방이 나왔다. 컬러가 화이트 앤 블루인 것을 보아 카이바의 방인 것 같았다.
“여기서 가장 잘 보이겠지.”
“…뭐가? 말해주면 안되냐?”
아직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죠노우치가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카이바는 그에 ‘알게 될거다.’ 라는 말만 하고는 방을 가로질러 테라스로 나갔다. 3층 꼭대기에 있는 카이바의 방, 그에 딸려있는 테라드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꽤 높았다. 하지만 앞에는 깜깜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하는 순간이었다.
팡
빨간 폭죽이 위로 솟아오르더니 예쁜 원을 그리며 터졌다. 그 폭죽을 필두로 하여 형형색색의 폭죽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밝은 폭죽은 깜깜했던 눈 앞을 비춰주었고 태양처럼 크고 아름다운 빛은 잠시 넋을 놓고 감상하기에 충분했다. 여름 축제를 제외하고는 볼 일이 거의 없었던 불꽃축제인 셈이었다. 죠노우치는 불꽃축제를 간 적이 거의 없었다. 축제를 즐길 시간도 없었거니와 관심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불꽃은, 너무나도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몇 분 정도를 감상하고 있다가, 이내 옆에서 카이바가 손을 꼭 맞잡았다. 놀란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카이바는 불꽃을 보는게 아니라 죠노우치를 보고 있었다. 카이바가 싱긋 미소지었다.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법한 그의 미소였다. 얘 오늘 생일이라고 자주 웃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테라스 밖이라 어두워서 안보일 법도 했지만 계속 터지는 폭죽 때문인지, 아니면 방 불빛 때문인지 아주 명확하게 표정이 잘 보였다.
“어떻냐, 범골.”
“나 불꽃축제 보는거 오늘이 두 번째야.”
“……그렇나.”
“진짜 예쁘다. 너랑 함께 봐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전했다. 말을 하면서도 간질간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을지 이제는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카이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더 이야기 해도 된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죠노우치는, 아까 연회 전에 자켓에 넣어둔 선물상자를 떠올리며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생일 축하해, 세토.”
불꽃보다 환하게 웃으며 죠노우치는 아예 몸을 돌려 카이바와 마주섰다. 지금이야말로 선물을 전해줄 타이밍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죠노우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타이밍 때문에 이때까지 실패를 한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품 속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 카이바의 왼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끼웠다.
그게 무엇인지 깨닫자, 카이바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건 반지였다. 단순한 디자인에 실버였지만, 정말 영락없는 커플링이었다.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반지는 카이바의 손에 꼭 맞았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반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죠노우치가 우물쭈물하며 카이바의 손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건 아닌가 걱정도 들었다.
“아.. 그게 백금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비싸서... 실버도 이쁘지 않아? 금보다는 은이 더 예쁜 것 같고... 너한테도 잘 어울리고...”
“범골.”
“으...으응??”
카이바는 오른손을 뻗어 죠노우치의 손에 들려있던 상자를 들었다. 그리고는 안에 들어있던 다른 반지를 집어 죠노우치의 왼손에 끼워주었다. 마치 프로포즈 하는 것 같잖아. 죠노우치는 심장이 더 쿵쾅댔다.
“백금이든 은이든 상관없어.”
지금 무척이나 기쁘군.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손에 끼워진 반지 위에 짧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죠노우치는 조금은 붉게 물든 듯한 카이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붉은 불꽃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또한 얼굴이 붉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혼반지는, 백금으로 맞춰주지.”
평소같았으면 엄청 부끄러워하며 무슨 소리냐고 난리 쳤을 법도 한데, 죠노우치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모든 말이 지금은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렸을 것이었다.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카이바를 바라보자 죠노우치도 그에 따라 배시시 웃고 말았다.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또한 카이바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안았다. 옆에는 아직도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있어 두 사람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두 번, 카이바는 죠노우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콧잔등을 따라 내려오며 계속해서 쪼아대듯 키스를 남겼다. 입술만을 남겨두고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이내 부드럽게 입술이 닿았다.
달콤한 시간은 불꽃놀이가 끝난 다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End.
Epilogue.
죠노우치는 어느 때와 같이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 누워있었다. 날이 조금은 쌀쌀해진 것 같았지만 햇빛은 아직도 따뜻했다. 그런 그의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여기 올 일이 절대 없을 것 같았던, 고귀하고 잘난 자신의 연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나 봤더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군.”
“옥상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냐.”
카이바가 자연스럽게 죠노우치의 왼편에 앉았다. 죠노우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카이바의 허벅다리에 얼굴을 베고 누웠다. 거부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카이바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금발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카이바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감촉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죠노우치가 왼손을 들어 카이바의 입술을 매만졌다. 카이바는 죠노우치의 손을 잡고 약지에 끼워져있는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카츠야. 카이바 특유의 낮은 저음이 죠노우치의 이름을 부르자 또 예외 없이 그의 심장이 쿵쾅댔다.
응. 그도 작게 대답한다.
Epilogue+
“모쿠바.”
“응, 형님.”
“죠노우치가 졸업 하자마자 결혼하는거 어떻게 생각하니.”
“……지금 그 질문 정확하게 35번째야.”
“범골은 화려한걸 싫어하니 결혼식은 정말 가까운 사람만 초대 해야겠군.”
“…….”
“아, 걱정하지 마렴. 반지는 백금으로 이미 봐두었단다.”
“그게 문제가 아닐텐데, 형님...”
애꿎은 모쿠바의 고생만 더 늘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