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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리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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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적은 글 뒷 이야기 적어보아따
*하지만 이 글도 2021년에 적은거라 ㅋㅋㅋㅋㅋ 팬케이크 뒤지다가 재작년에 이를 갈며 적은게 기억나서 아까워서 올려봄!!
*거듭 강조하지만 최애는 제온이 맞슴다🥲
*글 겁나 김.......... 오만자 넘움..........




탁탁탁탁.
붉은 색이 아른거리는 벽에 검은 색의 실루엣이 지나갔다. 돌바닥에 발이 닿을 때 마다 탁탁 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뭐가 그리 급한지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도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앞으로 달려갔다.
흰색 벽에 비춰진 붉은 색이 진해질수록, 그것이 내는 열기에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발의 남자는 뛰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제온!!!"

별안간 그 남자가 어떤 이름을 크게 불렀다. 얼굴이 찡그려지고 목이 터져라 크게.  붉은 것이 내는 연기때문인지 아니면 너머에 있을 무엇때문인지 눈에서는 눈물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달렸을 때, 그의 눈에 커다란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기가 안개역할을 하여 흐릿하게 보이긴 하였지만, 티오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틀림없는 저 문이다! 문 가운데에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마계의 심벌. 자기의 키의 서너배는 될 듯한 높이지만 남자는 문 앞에 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았다.

"앗, 뜨..."

그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손을 뗐다. 쇠로 만들어진 듯한 그 회색 손잡이는 보기보다 무척이나 뜨거웠다. 옆에서 아른아른거리는 붉은 불꽃. 타다닥 타는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는 불은 건물의 기둥까지 장악하고 있어 한시바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잠시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덥고 벅찬데 안에 있을 그 사람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제온! 안에 있는게지??!! 내 말이 들리면 대답해보게나!! 제온!!!"

문을 쾅쾅 두들기며 금발의 남자는 애타게 이름을 불렀다. 이미 안에 있다는 것은 알고있다. 안에서 희미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한 희미한 마력.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그는 붉은색 망토를 늘여 손잡이를 두껍게 감쌌다. 치이익. 얼마나 뜨거운지 망토가 살짝 타며 치익 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으며 그대로 잡고 힘껏 당겼다.

쿠구궁. 두터운 문이 바닥에 끌리며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자마자 뿜어져나오는 엄청난 열기. 남자는 순간적으로 팔로 얼굴을 감싸 보호했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한 눈에 봐도 엄청날 정도로 넓은 방. 마계에서 가장 넓다는 마궁의 대회의실 만큼이나 넓었지만 그 곳은 이미 커다란 불길에 사로잡혀 있었다. 타버린 것은 아닌지 이미 늦은 것은 아닌지 하는 끔찍한 상상에 잠시 빠졌지만 고개를 세차게 젓는 것으로 털어버린 뒤 방에 들어갔다.
이미 옅어져있는 누군가의 마력을 온 신경을 집중해 위치를 찾아냈다. 남자는 위치가 파악되자마자 불길에 뛰어들어 그곳으로 향했다. 곧 있으면 물을 사용할 수 있는 파티가 올 것이니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 불에 살짝 그을려 탄 옷과 거멓게 재가 묻은 얼굴이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곳에 있을, 애타게 불렀던 '제온' 이라는 자를 찾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이윽고.

"제...제온!!??"

찾던 자를 찾은 듯 이름을 비명같이 외치던 남자가 금발을 휘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제온 제온 제온..!! 눈물이 앞을 가려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는 애써 억누르며 벽에 기대고 앉아있는 남자에게 달려갔다. '제온'이라는 남자는 달려온 남자와 쌍둥이인 듯, 서로 아주 똑같이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발의 남자와 제온이라는 남자가 마주보게 되자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금발의 남자는 주저앉아 있는 제온의 눈높이에 맞춰 저도 그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굳게 닫힌 눈가를 쓸었다.

"제온..? 정신 차리게, 제온..!"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손. 금방이라도 울 듯 머리색과 같은 금안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잔뜩 그을린 머리카락과, 치열한 전투였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크고 작은 상처들. 입과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 그리고 불의 열기탓에 땀으로 젖어버린 이마.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온을 끌어안으며 엉엉 소리내어 울고말았다. 근엄과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건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꼭 안고선 볼을 부비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오랜만에 인간계에나 다녀와라. 근래 1년동안 열심히 일한 보상이라고 해두지.]

[누...? 제온이 왠일인....]

[가기 싫다는 걸로 간주할까?]

[아.. 아닐세!! 다녀오겠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아직까지 약속한 날이 되려면 2달이나 남았는데도, 제온이 자발적으로 인간계에 다녀오라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상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데다가 한치라도 오류가 없는 완벽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계에 가는 것은 상상도 하고있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다녀오라고 한 그의 권유에 의아함과 당혹감이 들긴 하였지만 워낙 동생을 아끼는 그였기에 그저 한번 주는 깜짝 선물인 줄만 알았다. 이 뒤에 얼마나 큰 짐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다..!!




"......ㄱ......가앗............ㅅ........."

"제온..?"

별안간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얼굴을 마주보았다. 조금씩 꿈틀거리는 눈썹이 의식이 돌아오는 걸 나타내 주는 것같았다. 제온의 눈이 살짝 떠지며 자안이 드러났다. 놀라 커진 눈 그대로, 남자 —갓슈라 불린—는 연이어 물음을 내뱉었다.

"정신이 드는겐가..? 본인을 알아보겠는가??"

"가....앗.......슈....."

"우누, 본인일세. 갓슈일세!"

다행이구려.... 정말 다행이구려.... 갓슈는 떨어지는 눈물을 소매로 스윽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갓슈는 점점 커져가는 불길을 훑어본 뒤 제온의 등과 다리를 팔로 받치고는 그대로 들어올렸다. 제온 또한 상태가 매우 안좋아 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안겼다. 갓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제온은 멀어지려 하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온 집중을 쏟아부었다.
갓슈는 점점 진해지는 연기때문에 눈과 코가 따끔거리고 매웠으나 지금 그런걸 신경쓸 여유같은건 없다. 그는 망토를 늘여 제온의 입에 살짝만 덮은 뒤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곧 있으면 파티와 티오가 올 것이네.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견뎌주게. 조금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를 듣자, 제온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내며 간신히 의식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것 또한 언제까지 갈지 몰랐다. 순간적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의식이 끊어질 것이다. 제온은 끝까지 갓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겨우겨우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갓슈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흘러나오는 본능이리라. 이성은 모르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의 형제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있는 것이다. 하기사 인간계에 있는 파트너 다음으로 가까운 존재이다. 유일하게 피를 나누고 살을 나눈 혈족. 그것도 쌍둥이. 자신의 반신이 처한 위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갓슈가 돌연 발을 살짝 멈추었다.

"....."

시르헨.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던 신하 중 한명. 과거 신의 시련에서 가장 힘들게 싸운 클리어 노트와 비슷하게, 마물의 멸망을 위해 '만들어진' 마물이었다는 걸 오늘 레이라에게 들어서야 알게되었다. 그런 그가 불길 가운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겨쳐져 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아 이미 죽은 것 같았다. 제온은 미리 이 자가 반역을 일으킬 걸 알고.... 제온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제온은 한동안 한 곳을 보며 움직이지 않는 갓슈에 저도 따라 눈동자만을 굴려 아래를 갓슈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았다.
그리고는—

'욱....'

저도 모르게 올라온 구역질에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껏 꾹 참고 있던 잔파들이 폭발해버린 것 같았다. 저 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력을 소모했나.  클리어 노트와 같은 기술을 가져 자신의 기술들을 모조리 다 <소멸> 시키던 그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자폭. 스스로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인 방법이었으나 시간이 촉박한지라 마나 결정석에 마력을 흘려보내는 바보같은 짓을 해버렸다. 그 결과 이 방이 모조리 다 불바다가 되어버렸지만. 비록 망토로 막았다지만 폭발의 잔파와 전투의 상처들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몸은 자신이 잘 안다고 누가 그러던가. 제온은 차마 올라오려는 핏덩어리를 그대로 토해낼 수 없어 삼키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우욱..."

역부족이었던 듯 결국 피를 왈칵 토하고 말았다. 그의 흰색 제복의 가슴팍이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아무말 없이 시르헨을 쳐다보던 갓슈가 제온을 돌아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간이 없다. 갓슈는 즉시 시선을 돌리며 이번에는 살짝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는 건 인간계에서 한번 겪은 걸로 충분하다.







"하아..하아....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갓슈는 건물 밖으로 드디어 나왔다. 그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나 둘 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티오와 만나기로 한 포인트에서 제온을 안은 채 주저앉았다.
하지만 제온은 갓슈가 앉자마자 또 피를 여러번 토했다. 생각보다 내상이 심한 듯 체내에 말할 수 없는 고통까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마지막에 녀석이 날린 공격이 독이었나. 제온은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한 팔로 제온의 어깨를 감싸고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갓슈는 피로 물든 그의 턱을 소매로 닦아내었다. 티오가  한시바삐 사이포지오를 시전해주어야 할텐데... 갓슈는 초조한 마음에 그저 제온의 머리카락만 자신의 손가락으로 살짝 손빗질을 하였다. 이럴 때 자신의 형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현실에 너무나도 큰 좌절감마저 들었다..
이런, 또 눈물이 나오려 해. 갓슈는 제온의 머리에 얼굴을 묻으며 속으로 울음을 꾹 삼켰다.

".......우....ㄹ......지마.......... 이 ㅂ......바....ㅂ.....보야...."

들리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올려 제온이 갓슈의 볼에 손을 대었다.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러나 정작 갓슈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떨어질 듯한 제온의 손을 자신의 손을 덮어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본다. 언제나 화려하게 빛나던 아름답던 제온의 자색 눈동자는 어느덧 빛을 잃어 희미하게 색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갓슈의 눈은 평소보단 가라앉았지만 아직 생기가 남아있는 투명한 황금색이었다. 그 사실에 제온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난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갓슈는 앞으로 천년동안 마계를 이어가야 하는 왕. 그를 지키는것이 숙명. 손가락을 이용해 조심스레 뺨을 쓰다듬자 갓슈가 작게 미소지어온다. 투둑 하고 떨어지는 눈물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미소를.

"안 울테니 조금만 버티게나.. 조금만..."

늦었다. 이미 독이 몸 안에 퍼져나갔다. 평소의 제온의 몸이라면 독 쯤은 자체회복력으로 상쇄시켰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크고 격렬했던 전투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내상까지 심각하게 입었다. 자체회복력 따위가 제대로 시행될 리 없었다. 차마 제온은 갓슈에게 이런 절망적인 말은 할 수 없어 안타까움에 작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작게 말을 이었다.

"ㄱ.....갓...슈......"

"누....?"

"네.... 겨....곁에...는....... 마.....많....은...사람.....들...이.....있으니....까...."

"무슨...말을 하는겐가??"

뭔가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갓슈가 잡고있던 제온의 손을 꽉 쥐며 물어왔다. 제온은 점점 흐릿해져가는 시야를 제대로 보려 눈을 찌푸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ㅁ......쿨럭!"

"말하지 말게..! 더 악화된단 말일세!"

"갓슈! 제온!!"

티오?! 또다시 피를 토하는 제온을 보며 다급히 소리치던 갓슈가 어떤 여성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단번에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저만큼치서 긴 다홍색 머리의 여자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궁의 의무대장인 티오. 갓슈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였다.

마계 최고의 회복스킬을 자랑하는 그녀는 제온과 갓슈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제온의 상태를 보고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색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는 거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티오는 두 손을 뻗어 주문을 시전했다.

"<사이포지오>!!"

곧 회복의 검이 나타나더니 초록빛을 내뿜으며 제온에게 박혔다. 그리고는 날개가 빙글빙글 돌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티오...."

"말 하지마..! 더 악화될 수 있다구!"

티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여차하면 싱 사이포지오까지 시전할 기세였다. 계속해서 뿜어져나오는 초록빛은 겉으로만 보이는 외상을 치료할 뿐 내상까지 완벽하게 치료해주진 못했다. 더군다나 독이다. 해독제가 있어야만 풀리는 독. 하지만 이 느낌은... 제온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갓슈에게 눈동자를 돌렸다. 갓슈는 손을 단단히 잡으며 제발 제발 이 한 단어만을 계속 읊조렸다.

"곧 레이라와 다른 사람들도 올거야. 이동수단이 오면 빨리 궁으로 가서 구체적이고 정홛한 치료를 받자, 응?"

티오가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온은 사이포지오 덕분인지 한결 수월해진 목소리에 갓슈를 나즈막히 불렀다.

"ㄱ...갓슈....."

"왜 그러는가...."

"괜찮아... 괜찮아 갓슈."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갓슈에게만 들릴 정도였지만, 티오는 그의 대화를 들으려하지 않았다. 마력을 사이포지오에 집중시키며 회복에 전념할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듣고싶지 않아했을 수도 있다. 지금 제온의 대화가 마지막 말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신의 본능을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제온. 티오는 그와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을지 몰라도 현재는 다른 친구들 못지않게 소중한 친구였다. 자신의 상관이기도 하였던 제온은 티나지 않게 티오를 잘 챙겨주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제온은 왕의 방패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티오를 꽤 신뢰하고 있었고 그녀의 강함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오는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배려를 알고 있었다. 그런 그를, 여기에서 잃을 수 없었다.

제온은 자신의 손을 계속 잡은 채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갓슈를 바라보았다. 나의 왕, 나의 동생. 평생을 바쳐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그가 대관식을 치렀을 때, 마지막까지 싸워 이겨 왕이 되었을 때, 파우드에서 자신의 증오를 모두 받아들였을 때. 태양같은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다. 더...더 오랫동안 옆에 있고 싶었는데. 그가 있을 화려한 무대 위에 같이 서지는 못하더라도 완벽한 무대를 준비하고 꾸며주고 싶었는데. 빛을 잃어가는 자주색 눈동자에 물이 어린다. 놀란 갓슈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눈물은 제온의 흰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왕위쟁탈전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제온의 눈물에 심장이 털컥 내려앉은 갓슈는 그의 뺨에 손을 대며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었다. 자신의 어깨를 감싼 갓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자신이 갓슈에게 울지 말라고 해놓고서 눈물을 흘리다니. 바보같이.

"제온...제온 왜 그러는가. 울지 말게. 본인도 울지 않겠네. 미안허이... 미안허이, 제온..."

쿨럭. 갓슈의 걱정어린 말에도 불구하고, 제온은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지 못해 그대로 토해냈다. 그의 토혈에 안색이 창백해진 갓슈는 그대로 제온을 꽉 안았다. 제온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답답해할 만큼 꽉 껴안았다. 사이포지오가 시전되고 있어 제온의 몸은 온통 연두빛으로 물들어있었으나 그 빛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온은 갓슈의 품에서 두어번 더 피를 토했다. 갓슈는 제대로 순간이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10년 전 돌아오자마자 왕의 직무를 배우고 남는 시간에는 몸을 단련해야했기 때문에 순간이동을 배울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게을리해서는 안되었다.

"갓슈... 갓슈..."

"본인은 여기 있네, 제온. 여기 있어..."

"고마워... 갓슈..."

제온은 자신을 꼭 껴안고 있는 갓슈의 체온을 느끼며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속에서는 이미 내장을 헤집어놓은 독 때문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피어올랐으나 그것보다 자신을 감싼 온기가 더 소중하고 기분이 좋았다. 제온은 알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평생동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계속 시전되고 있는 사이포지오 덕에 이 말은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갓슈는 제온의 말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된 내 가족. 자신을 보좌하는 재상이기 전에 제온은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였다. 자신을 가르쳐주는 스승이기도 하였고 때론 엄격하게 그릇된 일을 바로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고마워해야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갓슈는 제온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제온... 제온... 날 두고가지 말게... 부탁이야... 제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티오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감정의 요동으로 인해 마력이 흐트러지자 일순 사이포지오가 파훼되며 진이 깨져버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계속해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티오는 자신의 주술이 끝났다는 사실조차 잊었다는 듯이 손을 그대로 앞으로 뻗은 상태였다.

"갓슈... 얼굴... 보여줘..."

"흑....으윽...."

갓슈가 제온의 머리에 묻었던 자신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내려 제온과 마주했다.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줄 몰랐다. 제온은 다시 손을 뻗어 갓슈의 뺨을 감싸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갓슈의 얼굴은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전혀 여의치 않다는 듯이 계속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왕의 얼굴이 이게 뭐야. 항상 단정하라고 했지. 목이 매여 나오지 않는 말을 입안에서 웅얼거렸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점점 의식이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제온은 억지로 힘을 쥐어짜내었다.

".... 갓슈..."

"...으흑....읏...!"

"날 받아...들여준... 모두들...고마...워..."

"아냐! 널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싫어!!"

정신을 차린 티오가 다시 감정을 정비하고 사이포지오를 시전했다. 하지만 틀렸다. 이미 내상은 치유할 수 없을만큼 심했고 독은 이미 온 몸에 퍼진 상태였다.

"...갓슈... 내 동생...그리고..."

듀포. 그는 하나뿐인 파트너를 떠올렸다. 살라고 했다. 살아남으라고 당부했다. 과거의 일에 얽매여 사라지려고 하는 그를 억지로 세상에 붙잡아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파트너는 자신의 바람대로 잘 살아주었다. 삶의 의미를 찾았고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5년 전 다시 재회했을 때, 그 모습에 얼마나 기뻤는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요한 표정도 좋았고 무심한 행동 뒤에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도 좋았다.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이 일이 다 끝나면 다시 찾아가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같이 보고싶었는데.

"...또 다른... 가족... 너무나도..."

"ㅈ...제온.... 제온.....?"

"너무...나도...사랑해..."

툭.
가볍고 간결한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이포지오의 연두빛이 사라지며 치유의 검이 사라졌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있는 티오는 다시 시전하는 대신,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두 손으로 막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제온..."

갓슈가 제온의 이름을 속삭였다. 한 손을 들어 굳게 닫힌 눈가를 조심스레 쓸었다. 아직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손끝으로 살살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그의 볼을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제온..."

아직 너무나도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 그의 볼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미 그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져 고통이 심했을 터인데도, 제온의 얼굴은 자고 있는 것 처럼 평온했다. 작은 미소를 띠우고 있는 것 같아보이기도 하였다. 갓슈는 그가 한 마지막 말을 상기시키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온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맞대었다.

"제온.... 제온..."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지만 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인간계에서의 트라우마가 올라오며 참을 수 없을만큼 절망에 빠졌다. 금방이라도 일어나며 얼른 일해! 라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레이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하지만 갓슈는 이미 생기를 잃은 금안으로 품에 안겨있는 제온의 이름만 하염없이 부를 뿐이었다.


**

시르헨의 반역은 재상 제온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굉장했다. 갓슈의 옆에서 충성스러운 심복으로 일했던 시르헨이 반란을 꾸몄다는 사실 자체도 충격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제온이 그를 상대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에 묻혀 입방아에 오르내리지조차 못했다. 10년. 금색의 왕조가 시작한지 고작 10년이 지난 지금 왕 다음으로 가장 강한 자가 죽은 셈이었다. 마계의 전력이 대부분 상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왕과 재상. 재상은 왕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를 직접 앉히는 자리다. 갓슈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온을 선택했고, 근위대장을 원하고 있었던 제온이었으나 재상직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근위대장 3명을 제온이 직접 정하는 조건이었다. 물론 자신의 혈육이기 때문에 제온을 재상자리에 앉힌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단 한가지, 갓슈가 가장 신뢰하는 자가 제온이었기 때문에 앉힌 것이었다. 그와 별개로 제온은 매우 강했고 그의 힘은 파죽지세로 성장하여 마계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물론 갓슈는 예외였지만.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매우 신뢰하였고 사랑했으며 그들 사이에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강한 끈이 있었다. 마음의 조각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순 있었으나 어릴 때부터 그들은 마치 한 몸인양 붙어다녔고 갓슈가 제온을 따르는 것처럼 제온 또한 갓슈를 살뜰히 챙기며 최선을 다해 보좌해주었다.

그런 재상을,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혈육을 잃은 것이다. 그 사실은 갓슈를 절망속에 넣기에 충분했다. 한 사람의 장례식은 그의 친족이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재 갓슈의 상태는 장례를 준비할 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침대에 계속 멍하니 앉아만 있었고 밥도, 물도 먹지 않은 채 자지도 않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티오가 미음을 들고 들어갔으나 고개를 젓는 것으로 거부의사를 나타냈다. 항상 밝게 빛났던 금안은 빛을 잃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티오는 그런 그에게 억지로 일을 시키고싶지 않아 몰래 주머니에 사이포지오의 결정석을 넣어줄 뿐이었다.

보통 마계의 장례식은 이틀동은 치뤄진다. 사망한 날의 다음날 새벽 자정부터 시작하여 분향소를 열고 당일 11시 59분이 되면 문을 닫는다. 그리고 그 다음날 편한 시간대에 시신을 땅 속에 안치하고 그 날도 당사자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나 제온은 보통의 사례에 들어가지 않아 장례를 준비하는데 꽤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왕족에다가 왕 다음가는 자리인 재상. 준비가 많은건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는 보존마법이 걸려있는 투명한 관 안에 안치되어있었고 본식에 참석하기 어려운 일반 백성들이 그를 추모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야한다. 그 자리 또한 친족이 지키고 있어야 했으나 왕인 갓슈가 유일했기에 브라고와 아슈론이 교대하며 호위를 섰다.

"갓슈는."

브라고가 교대하러 온 아슈론에게 물었다.

"티오 말로는 글쎄... 방에서 안나오는 중이라고 하더군."

아슈론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군. 나도 이런데, 갓슈는 얼마나..."

아슈론이 그의 눈가를 큰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브라고는 말없이 홀 가장 안 쪽에 안치되어있는 관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과는 대비되게, 제온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브라고와 아슈론도 마음이 힘든건 매한가지였다. 레이라에게 제온의 죽음을 들었을 때 처음엔 얼마나 어이없고 화가 났는가. 레이라가 짖궂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정말 드물게 아슈론이 불같이 화를 냈다. 500년동안 임기를 지내며 총사령관인 브라고나 근위대장인 아슈론은 위험상황에 처할 일이 많다. 그렇기에, 500년 임기룰 다 채울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항상 작전을 나가면 후계자의 후보 리스트와 유서를 작성하고 나가곤 했다. 하지만 제온은 달랐다. 어딜 가더라도 살아 돌아올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가 누구에게 당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그와 마주한 자라면 다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 힘없이 눈을 감고 있는 제온과 그를 품안에서 결코 놓지 않으며 복귀한 갓슈를 보며 현실로 돌아왔다.

갓슈에게서 제온을 떼어놓으려 할 때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발악을 했다. 제 형제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꼭 그러안고 마구 소리를 지르며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갓슈가 그런 눈빛을 하는 것은 모두 처음보았기에 주변 사람들은 다 흠칫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주저앉으며 너무나도 애처로운 목소리로 제온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모두 멍하니 서있어야했다. 눈을 떠주길 바라는 동생의 마음도 몰라준 채 제온은 결코 떠주지 않았다. 그가 제온의 뺨을 쓰다듬고, 일어나보라는 듯 두드려도 결코. 그 사실에 갓슈는 참아왔던 울분을 다 토해냈다. 왕궁 안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한참동안 현실을 부정하듯 오열했다. 티오의 사이포지오를 찾으며 다시 한 번만 시도해달라고 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절박해보여서 주변에 서있던 자들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레인과 아슈론이 갓슈를 겨우 떼어놓고 나서야 레이라와 브라고가 제온을 데리고 궁정의무실로 갈 수 있었다.

제온의 시신은 왕족 소유의 땅에 묻힐 예정이었다. 오늘은 홀에 공개분향소를 마련하는 3일 중 마지막 날이기에 레이라와 칸쵸메는 분주하게 움직여야했다.

"내일 갓슈가 참석할까...?"

"글쎄. 그래야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

칸쵸메의 질문에 레이라가 드물게 머뭇거렸다. 갓슈의 양친인 다우완.벨이 승하했을 때에도 갓슈는 의젓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렇게 2일동안 나타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품안에서 가장 사랑하는 형을 떠나보낸 충격을 무시하지 못하기에, 그 누구도 감히 참석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갓슈가 제온과 돌아왔을 당시 주변에 서있던 레이라와 칸쵸메는 더더욱.

부우우-

낮고 긴 고동소리에 레이라와 칸쵸메,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손을 멈추고 문을 쳐다보았다. 이 소리는... 레이라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고동소리는, 왕이 행차했을 때 나는 소리다. 저기 서 있는 남자는 갓슈다. 검은 상복을 차려입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나타난 그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홀 안으로 들어왔다. 뒤에 항상 서있던 제온 대신 오늘은 레인이 서있었다.
멍하디 멍한 표정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미소를 짓지는 않았다. 금색 눈동자에는 여전히 생기가 없었다.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갓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갓슈는 손을 들어 인사에 답했고 그에 사람들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으며 제온이 있는 안쪽까지 걸어갔다.  
홀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2일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왕이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는 원래 자신이 자리를 지켰어야 할, 관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갓슈는 투명한 관 안에 누워있는 제온을 보며 한동안 서있다가, 이내 자신의 옆에 다가온 레이라에게 작게 웃어보였다.

“미안하네, 레이라. 나 대신 수고를 해주었구려.”

그의 목소리는 오랜 시간동안 소리를 내지 않은 탓에 마치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여전히 갓슈의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있던 레인에게도 웃어보였다. 하지만 이전의 싱그러운 미소는 아니었다.

“나 말고, 브라고와 아슈론에게. 그 둘이 여기를 교대로 지켜주었으니까.”

“그렇군. 두 사람을 만나면 감사인사를 해야겠으이. 오늘이 마지막 날인가. 제온은 좋겠구려. 꽃을 이렇게나 많이 받았으니 말이네.”

제온이 의외로 꽃을 굉장히 좋아했지 않은가. 갓슈가 관 아래에 쌓여있다시피 한 꽃들을 보며 말을 꺼내었다. 갓슈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 2일동안 엄청난 수의 인파가 몰려왔었고 그들은 저마다 가져온 꽃들을 앞에 놓았다. 현재 계절에 주로 피는 꽃들부터 시작하여 인간계의 장미와 비슷한 꽃들까지. 그 덕분에 홀 안에는 각양각색의 꽃향기가 가득했다. 제온이 꽃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공적인 향을 굉장히 싫어하는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향이 자연 그대로의 꽃향기였다. 다른 외곽지구로 출장을 가는 날이면, 제온은 항상 그 지역의 꽃시장에 가 꽃을 한다발 사오곤 했다. 그 꽃은 그의 집무실 책상 위 화병에 고이 꽂아두었다. 우스갯소리로, 제온의 생일날 꽃으로 도배를 해도 좋아할거라는 말도 떠돌았다.

“갓슈. 앉아있어.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아.”

레인이 갓슈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닐세. 괜찮네. 티오가 사이포지오 결정석을 반나절에 하나씩 주고갔네. 그 덕분에 몸도 괜찮으이.”

“하지만...”

“원래 본인이 있어야 할 자릴세. 늦었더라도 본인이 지켜야하지 않겠나.”

부드럽지만 강한 어조. 갓슈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에 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갓슈의 오른쪽 뒤에 섰다. 갓슈는 맨 위에 걸치고 있던 검은 망토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는 꿋꿋한 자세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정적이 앉았던 홀 안도 조금은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레이라와 칸쵸메는 시선을 교환하고, 이내 자리를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


이 날 아침, 티오는 여전히 손에 미음을 들고 갓슈의 방 앞에 서있었다. 오늘이 분향소 마지막 날인데, 갓슈는 도통 밖으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티오는 어제 늦은 새벽에 잠시 들렀다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는 갓슈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마음이 쓰라렸다.
똑똑똑
티오가 문을 3번 노크하였다.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작은 한숨을 쉬며 티오가 말했다. ‘갓슈, 나야. 들어갈게.’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내리려는 순간.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엥. 티오가 입으로 소리를 내며 의아함을 표했다. 그리고 그 문 앞에는, 갓슈가 서있었다.

“ㄱ...갓슈....?”

“...티오. 고맙네. 사이포지오 결정석 덕분에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네. 아르힌. 목욕을 하고싶네만 혼자서는 무리일 듯 허이.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ㅇ..예, 폐하.’ 갓슈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중을 불렀다. 아르힌은 곧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욕실에서 목욕을 준비하려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곧이어 들려왔다. 그리고 갓슈는 티오가 들고 있던 미음이 담긴 그릇을 받았다.

“목욕이 끝난 후 먹도록 하겠네. 2일동안 한결같이 본인을 챙겨주었구려. 정말 고맙네, 티오.”

“....바보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네. 걱정을 끼쳐버렸구려.”

티오는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원망과 슬픔 섞인 눈빛으로 갓슈를 바라보며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해. 안 그럼 화낼거야.’ 라고 말하고는 손을 들어 갓슈의 뺨에 손을 대었다. 갑작스런 온기에 갓슈는 잠시 놀란 듯 하였으나 이내 작게 미소지었다. 핏기없는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차가웠다. 티오는 달래듯 몇 번 쓰다듬었다. 목욕준비가 끝났다고 이르는 아르힌의 목소리에 갓슈는 몸을 돌렸다. 티오는 닫힌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있고 4시간 뒤, 갓슈는 분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
다음 날, 발인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 날은 아무나 참석할 수 없고 친족만 참석할 수 있었다. 제온의 친족이라 해도 갓슈밖에 없으니 갓슈는 가까운 지인들까지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 가운데 그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제온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눈물은 말라버린 듯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멍했다. 이 모든게 거짓말같았다.

“파티.”

관 아래에 쌓여있는 꽃을 정리하고 있던 파티를 불렀다.

“응? 왜, 갓슈짱?”

“부탁이 있네. 이 미넬꽃만 따로 모아주지 않겠나.”

“아... 물론이야. 하지만 정리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거야.”

“괜찮네. 오늘 본식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부탁허이.”

“으응. 알겠어.”

파티는 여전히 힘이 없는 갓슈를 보며 순순히 대답했다. 원래의 파티와 갓슈였다면 파티 특유의 발랄함으로 이미 갓슈에게 달라붙었을테지만 이 상화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갓슈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더 꺼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 어설프게 위로를 했다가는 독이 됨을 알기에 대화를 끝마쳤다.
미넬꽃은 인간계의 나팔꽃과 비슷하게 생긴 꽃이다. 조금 다르다면 이 꽃은 한 번 피면 1달을 살 수 있는 꽃이었다. 또 하나의 꽃잎으로 이루어져있는 나팔꽃과는 다르게 미넬꽃은 5개의 꽃잎으로 되어있었다. 그 외의 모습은, 정말 나팔꽃과 비슷하다. 색깔도 짙은 보라색이었기에 제온의 자색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파티는 속으로 갓슈가 제온을 추모하기 위해 그를 닮은 미넬꽃을 모아달라는 것이라고 살짝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티오는 어디갔어?”

준비가 거의 마쳐갈때 쯤, 웡레이가 말했다. 확실히 오늘 아침부터 티오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갓슈가 현재 이 곳에 있는 이상, 그의 옆에 붙어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인간계에 갔어...”

조금 망설이는 듯 하다가, 칸쵸메가 대답했다. 칸쵸메의 대답에 웡레이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더니 이내 갓슈 몰래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 그렇구나. 갓슈는 알고 있나?"

"아니... 갓슈한테 말하면 상태가 더 안좋아질 것 같아서 말 못했어. 티오도 가급적이면 말하지 말라고 했구."

당연한 말이었다. 갓슈와 제온의 유대가 두터운 것처럼 제온과 듀포의 관계도 정말 각별했다. 그리고 갓슈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온의 죽음에 갓슈 못지않게 충격받을 듀포를 데려온다는 것은, 갓슈에게 더욱 큰 죄책감을 넣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듀포를 데려오지 않는 것 또한 그에게 할 짓이 못된다. 뒤늦게 알게 된다면 듀포 또한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스러워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본식이 끝나기 전에는 최대한 도착해보겠다고 했어. 시간이 좀 더 걸릴지는 몰라도 듀포한테 제온의 묘는 보여주는게 도리라고 하길래..."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해. 티오가 옳아."

현재 인간계와 마계는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도록 발전한 상태였다. 이미 많은 마물들이 왕래하며 즐거운 재회를 즐겼다. 다만 왕인 갓슈와 재상인 제온, 그리고 몇몇 고위관직에 앉아있는 마물들은 일이 너무 바쁘고, 게이트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인간계로 섣불리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들이 마계에 오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렇게 하기엔 듀포나 키요마로 등도 바쁜 몸인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제온이 2달 뒤 갓슈에게 같이 특별휴가를 내고 잠시 인간계에 놀러가자고 했는데... 바보같은 재상님이 1주일 전 게이트를 열고 갓슈 먼저 인간계로 보내버렸다.

홀 안은 이제 거의 준비가 끝났다. 쌓여있던 꽃들도 거의 정리되었고 조문객들을 위해 마련하였던 의자와 상 또한 치웠다. 이젠 발인을 하고 지정된 땅에 묻는 것만이 남았다. 웡레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직도 멍하니 제온을 향해 서있는 갓슈를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운을 조금 차린 듯한 모습에 안도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지 않아보였다.

무심하게도, 날씨가 너무 좋았다. 소설에서나 보았던, 장례식에 비가 내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었다. 태양은 뜨겁지는 않았으나 밝게 내리쬐고 있었다. 제온이 누워있는 투명한 관은 이제 보랏빛 천으로 덮여 가려져 있었다. 왕족 소유의 땅은 왕궁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왕궁기사 4명이 관을 운반하고, 그 뒤를 갓슈가 따랐다. 그리고 그 뒤에 가까운 지인들이 뒤따라 걸어갔다.
제온이 안치될 곳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미 신관 2명이 도착해있었다. 갓슈가 도착하자 그 둘은 예를 갖춰 인사했고 갓슈 또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받아주었다.

"갓슈짱, 여기."

파티가 갓슈에게 꽃을 전해주었다. 아까 갓슈가 따로 부탁해놓았던, 미넬꽃이었다. 파티는 꽃을 하나로 모아 보라색 리본으로 깔끔하게 묶어놓았다. 이파리도 조금 다듬은건지 마치 신부가 드는 부케처럼 동그란 모습이었다. 그에 갓슈는 파티에게 작게 미소지어주었다.

"정말 고맙네, 파티. 깔끔하구려."

그에 파티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곧이어 뒷걸음을 쳐 본래 서있던 자리에 섰다.
제온을 묻어주기 전, 대신관이 성서를 펼쳐 축복을 읊었다. 왕족이 죽으면 꼭 거치는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조차 레이라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죽은 상황에서 축복이라니.

"너, 마음에 안들지?"

브라고가 레이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응. 전혀."

레이라가 대꾸했다. 이 상황이 마치 갓슈를 조롱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 관을 넣을 차례였다. 갓슈의 앞에 놓여져있는 관을 기사 4명이 들어 조심스럽게 땅 안으로 넣었다. 아니, 넣으려 했다. 그 순간 갓슈가 기사들을 성급히 저지했다.

"폐...폐하...?"

"잠시만... 잠시만..."

저지하기 위해 들어올린 오른손이 급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 뿐 아니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급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갓슈의 앞에 서있는 기사들과 신관이 당황하는게 보였다. 갓슈의 흔들리는 마력을 느낀 레이라가 갓슈에게 급히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서 갓슈를 마주한 레이라는, 이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갓슈의 눈에서 눈물이 쉴새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제온을 보게 해주게."

"허나, 폐하..."

"마지막이지 않은가... 이대로 묻히면 다시는 보지 못하잖는가..."

갓슈의 말에 서있던 자들 모두가 숙연해졌다. 갓슈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신관이 망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물론 갓슈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왕이 하고싶다는데 막을 이유도 없었고 막을 법도도 없었다. 다만, 저렇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제온을 한 번 더 마주하게 된다면,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갓슈는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보라색 천을 살짝 걷었다. 레이라는 일부러 갓슈의 옆이 아닌 뒤를 지켰다. 갓슈가 하는 마지막 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듣는다면 자신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제온."

갓슈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온의 이름을 불렀다. 관 위로 시선을 마주하니, 분향소때처럼 옆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갓슈의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 관 위로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관이 아니었다면 제온의 눈이었을 자리였다. 갓슈는 아까 파티에게서 받은 꽃을 관 위에 올려놓았다. 손을 가슴에 모아둔 채 누워있는 제온의 위로 꽃이 올려지자 마치 꽃을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온,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미넬꽃이네. 예쁘지 않은가. 지금이 딱 재배철이라고 하더군."

갓슈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파티가 만들어주었네. 자네를 아주버님이라고 부르며 웃던 친구 말일세. 너무 바빠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 기억 못할수도 있네만... 고맙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억지로 웃으려던 갓슈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사라졌다.

"제온, 이제... 이제 본인은 두 번 다시 자네를 보지 못해."

갓슈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둘러 갔을꼬... 뭐가 급해서..!"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었다. 분향소때의 침착한 모습은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며 함께 마계의 미래를 의논했다. 누구보다도 의지할 수 있는 형제였다. 자신의 1000년동안 옆에 있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500년 임기동안은 자신의 옆에서 지켜준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약속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의 강함을 알고 있었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뭔가. 고작 10년만에 그는 자신의 곁을 떠나버렸다. 영영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네가 약속했지 않는가...! 본인을 지켜주겠다고... 그동안 못 다한 형 노릇을 해줄거라고...!!"

원망이 섞인 말투였다. 갓슈는 관 위로 거의 엎어지다시피 하며 원망섞인 말을 계속 내뱉었다. 자신을 두고 가버린 제온에 대한 원망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절망이 섞인 절규였다. 그 모습에 레이라는 차마 보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비가 왔다면 눈물을 감추어주었을텐데, 하늘은 맑기만 했다.

"... 본인을.."

갓슈가 절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본인을 혼자 두고 가버리는겐가..."

갓슈가 관을 쓰다듬었다. 보내기 힘들었다. 아직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든게 거짓말같았고, 지독한 악몽같았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 눈을 뜨면 제온이 자신을 깨우며 아침을 먹자고 할 것만 같은, 그런 꿈.

"...본인은, 아직 자넬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어..."

갓슈가 너무나도 절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준비할 수 있을리가 없다. 몇 십년이 흐른다고 해도 보낼 수 있을리가 없다. 2일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제온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가. 마계의 왕이라는 자리는 이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러기엔 자신의 주변에 아직 많은 이들이 남아있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갓슈."

갓슈의 목소리만 울리던 장소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퍼졌다.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다. 갓슈는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동안 뇌가 사고를 정지한 듯 멍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겨우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인 왼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올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자였다.

"듀포...ㄷ..듀포...!"

듀포였다. 백색의 머리카락은 제온을 연상시켰고 화려한 자색 눈동자와는 다른, 포근한 느낌의 에메랄드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5년 전 만났던 것보다는 더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틀림없는 듀포였다. 그의 옆에는 자신의 파트너, 키요마로도 있었다. 티오도 옆에 있는걸 보아하니 그녀가 데려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듀포가 갓슈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놀란 기사들이 제지하려 했으나 브라고가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제온의 인간 파트너다. 브라고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창을 거두었다. 듀포는 갓슈 앞으로 다가와 그대로 앉으며 갓슈를 껴안았다. 자신과 비슷한 체격이 된 갓슈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갓슈가 듀포의 등 뒤로 팔을 두르며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듀포.... 듀포....!"

"갓슈."

갓슈는 그제서야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상태에서 듀포에게 안겨 오열했다. 제온의 파트너인 듀포에게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듀포...! 미안하네... 제온은 언제나 본인을 지켜주었는데도... 본인은 그를 지켜주지 못했어... 자넬 볼 낯이 없으이...!"

"갓슈.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으읏... 갓슈는 따뜻한 듀포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제온이 죽기 전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과 오버랩되었다. 이 은색의 파트너들은 왜 이렇게 차갑고도 따뜻한지.
듀포는 갓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한 말은 100퍼센트의 진심이었다. 제온은 자신의 동생이자 왕인 갓슈를 끝까지 지키고 싶어했고 제온의 소망은 곧이어 듀포의 소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듀포는 어느 새 다가온 키요마로에게 갓슈를 맡겼다. 자연스럽게 키요마로와 듀포가 바뀌었으나 이미 정신없이 울고 있는 갓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듀포는 자신의 앞에 있는 투명한 관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살아달라고 부탁했던 파트너였다. 두 번 다시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선 마계로 돌아가버린 아이였다. 5년 전 다시 재회하였을 때 여전히 작은 꼬마였지만 자기 자신도 꽤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아 안도했다. 게이트가 연결된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서로가 바빠 만나지 못했지만 곧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라니.
듀포는 울지 않았다. 단지 투명한 관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제온... 정말 수고했어."

티오가 다가와 듀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울고 있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슬퍼할 그였다.

"이제 푹 쉬어. 다 괜찮아. 안심해라. 그러니..."

티오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듀포는 관 위에 올려져있는 미넬꽃다발을 다시 정돈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만나자, 제온."

닿지 못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듀포는 앞에 서있는 신관들에게 눈짓했다. 티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신관 중 계급이 더 낮은 신관이 보라색 천을 다시 덮었다. 기사들이 다가와 마력으로 관을 들어올려 준비된 곳에 관을 넣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게...! 아직 안되네! 준비가 안됐어!"

"갓슈...! 갓슈, 괜찮아... 갓슈..."

"안돼! 제온...! 제온!"

땅 안으로 들어가는 관을 보며 갓슈가 발악했다. 너무 울어 목소리는 이미 반쯤 나간 상태였다. 제온을 부르며 관 쪽으로 가려는걸 옆에 서있던 레인과 키요마로가 겨우 말렸다. 결국 바닥으로 무너지며 흙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비통했다. 키요마로가 다가가 다시 그를 안아주며 토닥였다. 그런 키요마로 또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 제온이 묻히고 흙으로 덮이는 과정 전부를, 듀포는 올곧게 서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렇게 제온은, 평생 만나지 못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

식이 끝나고 참석했던 마물들 대부분이 해산했다. 제온을 묻은 자리에 비석까지 세워지고 나서야 갓슈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아니, 그쳤다기 보단 울다 지쳤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재상 제온.벨 영원히 그의 달빛이 마계를 비추길.
황색의 왕조 994년~금색의 왕조 10년]

갓슈는 주저앉은 채로 비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색의 왕조 10년. 10년... 저 금색의 왕조라는 단어를 칼로 긁어 없애버리고 싶었다. 이러고도 내가 왕인가. 형제 하나 지키지 못한 내가 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날이 점점 차가워질거야. 안에 들어가자."

레이라가 갓슈의 검은 망토를 건네며 말했다. 키요마로는 퉁퉁 부은 얼굴로 레이라가 준 망토를 갓슈의 어깨에 걸쳤다. 들어가자, 갓슈. 키요마로가 어깨를 감싸며 힘을 주어 올리자, 그대로 순순히 갓슈가 일어섰다. 며칠동안 거의 먹지 않고 자지도 않은 탓에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내 부축하려는 아슈론을 가만히 저지하고, 갓슈는 키요마로에게 감싸진 채 궁을 향해 걸어갔다.
듀포는 여전히 제온의 묘를 보며 서있었다. 해는 조금씩 저물어가는 듯 점차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듀포는 비석 앞에 무릎을 가지런히 꿇고 앉았다.

"정말 나쁘네, 제온."

그가 입을 열었다.

"나더러는 살라고 붙잡아놓고선, 왜 먼저 놓아버린거야."

겉으로 듣기엔 꽤 무덤덤한 말투였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눈치 챌 정도의 깊은 슬픔이 담겨있는 말투였다.

"제온."

10년 전 만난 은색의 꼬마는 다가가면 베일 듯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런 차가움을 자신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점이 좋았다. 언제나 '어이, 듀포.' 하고 부르며 자신을 지켜주었다. 물론 앤서토커라는 능력이 있었지만 제온은 자신을 확실히 지켜주었고 절대 다치는 일 하나 없도록 감쌌다. 싸울 때마다 느낄 수 있었던 흰 망토의 질감은 부드러웠고 자신은 그런 제온을 가족이라고 여겼다. 그래, 가족이다. 유일무이한 자신의 가족이다. 가족.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덤덤했던 마음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쩌면 듀포는 본능적으로 알고 억누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갓슈의 앞에서 자신이 울면 정말 갓슈는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억지로 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지금은 달랐다. 듀포는 참는 대신, 감정을 표출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기에.

"윽... 크흑... 어어엉...!!!"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줄 몰랐다. 자신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하였다. 제온. 제온. 한 번 억누른 뒤 터져버린 감정은 다시 가다듬기 어려웠다. 듀포는 비석에 쓰인 '제온.벨'이라는 단어를 쓰다듬으며 그의 이름만 되풀이했다.

"……듀포."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불렀다. 하지만 눈물을 그칠 순 없었다.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키요마로다. 분명 자신이 걱정되어 중간에 누군가에게 갓슈를 맡기고 되돌아왔을 터였다. 키요마로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검은 옷가지를 듀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뒤 얼굴을 묻는게 느껴졌다. 듀포는 그의 온기가 더욱 기폭제가 되었는지 바닥에 엎드려 슬픔을 토해냈다.

"키요...마로...! 키요마로...!"

"으흑..."

"제온이...가버렸어...가버렸어...윽... 가버렸어..."

"듀포..."

키요마로는 아까까지만 해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던 듀포를 떠올렸다. 슬프지 않을리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슬퍼할 자가 바로 듀포였다.
티오가 인간계에 오기 전, 듀포는 키요마로의 집에 찾아왔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찾아온 그를 보며 키요마로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갓슈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쩌면 듀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키요마로를 찾아오기 전부터, 자신의 반신의 죽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티오가 찾아와 제온의 죽음을 들었을 때 충격으로 말도 안된다며 소리질렀던 자신과는 달리, 듀포는 키요마로를 붙잡으며 오히려 정신차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빠르게 상황파악을 하여 티오를 데리고 곧바로 마계로 이동했다. 어쩌면, 듀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한 것이 아니라,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현실을 부정하며 그럴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키요마로는 한참을 주저앉아 눈물흘리는 또다른 반신을, 꼭 껴안아주며 위로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키요마로와 듀포가 궁으로 돌아간 시간은, 이미 하얀 달이 마계를 환히 비추는 때였다.


**

제온의 장례식이 끝나고 1주일 정도가 흘렀다. 키요마로와 듀포는 그 동안 마계에서 머물며 뒷정리를 도와주었다. 듀포는 활동할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을 도왔지만 저녁마다 자리를 비우곤 했다. 주변 사람들은 듀포가 사라져도 어딜 갔는지 알고 있다는 듯 아무도 찾지 않았다.
갓슈 또한 점차 안정되어갔다. 아니, 안정되어가는 것인지 속이 다 곪아버렸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갓슈는 제온을 떠나보낸 후 미친듯이 일했다. 제온이 죽은 직후 며칠동안 거의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던 몸상태에서 일까지 하니 무리가 온 몸은 얼마 안가 쓰러졌다. 티오가 영양액을 처방하며 쉬엄쉬엄 하라고 했지만,
‘한 시라도 쉬고 있으면 머릿속에 온통 그 날이 떠올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네. 미안하네.'
라고 멍하니 대답하였다. 그에 티오는 삼시세끼 챙겨먹기까지는 약속을 받아냈다. 또한, 꿈을 꾸지 않을 정도의 강한 수면제도 주었다. 억지로 먹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틀에 하나씩은 먹고 잠을 취하라고 했다.

제온의 부재로 인해 일이 밀려 한동안은 궁이 매우 바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하진 않았다. 갓슈의 옆에서 키요마로도 도와주고 있었고 듀포 또한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궁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관심사는 하나 있었다. 누가 차기재상이 될 것인가.

“본인은 재상직에 누구도 두지 않을 것이네.”

갓슈가 고위관료들을 모아놓고 통보했다. 그에 어스, 브라고, 레이라, 아슈론, 레인은 당황하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뒷얘기를 기다리자 갓슈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소짓는다고 해도 눈가가 퀭한 상태에서 짓는 미소는 더욱 안쓰러워보일 뿐이었다.

“…미안하네. 아직은 제온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재상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드네. 다음에, 마음이 추스러지고 아프지 않는 때가 오면... 그 때는 내 손수 임명하겠네. 그러니 그 전까지는 재상의 직무를 자네들에게 분배하고 싶네. 물론 본인도 말일세.”

갓슈의 말에 레이라가 쓰게 웃었다. 마음이 추스러지는 날이 대체 언제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신의 임기 내에 일어날 일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재상의 직무가 왕 다음으로 많다고 알려져있지만 6명이서 나눈다면 버틸 순 있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서류로 올리지. 잘 부탁함세. 제온이 없는 지금 일은 더 많아지겠네만... 자네들에게 미안함 뿐이구려.”

“…너야말로 좀 쉬는게 어때. 그게 얼굴이냐? 티오한테 들었다. 쉬지도 않고 일만 한다고.”

브라고가 입을 열었다.

“하하. 티오가 걱정을 많이 하나보구려. 너무 그러지 말아주게. 이미 티오에게 한 소리 듣는 중이니.”

갓슈의 실없는 웃음소리에 마물들은 작게 한숨쉬었다. 은근 고집이 센 이 왕은 일을 줄이는 상황은 절대 없을 것이다. 몸이 상한다고 해도 결코.

집무실에 있던 관료들이 나가고 어스와 브라고만이 남았다. 총리대신인 어스, 그리고 총사령관인 브라고. 레이라가 나가기 전 슬쩍 뒤돌아보았으나 갓슈는 그녀에게 아무말 없이 싱긋 웃어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괜스레 불안했다.

“네가 잡아놓으라길래 일단 잡아놓긴 했다만. 반역에 대한 네 처분을 알고 있는지 저쪽에서 여유부리고 앉아있어.”

“…어리석구려. 다들 머리가 나쁜가보오.”

갓슈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확 달라졌다. 저릿저릿하게 느껴지는 전격의 힘에 브라고와 어스 모두 살짝 긴장했다. 갓슈는 다른 이들에게 약하고 순한 왕이었으나 그가 가진 힘은 제온보다도 훨씬 강하다. 그 힘을 눌러놓았을 뿐, 그가 마음만 먹으면 마계 전체를 초토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갓슈는 이제껏 일어난 3개의 반란 중 2개의 반란에 너무나도 유한 처분을 내렸다. 그 처분에 마음이 동한 몇몇은 갓슈에게 돌아와 눈물로 충성을 맹세한 자들도 있었으나 어딜가도 모난 돌은 있기 마련. 예전에 제온은 갓슈에게 불호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

[네 녀석이 바보같은 결정을 내리니 반란이 두 번이나 연이어서 일어나는거다! 때론 단호하게 일을 처리해야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너무 그러지말게, 제온. 1차때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온 자들을 잊었는가? 본인은 앞으로도 계속 저들의 이야기를 들을걸세.]

[갓슈…!하... 반란이 점차 규모가 커지고 있어. 난...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본인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네! 무엇보다 제온, 자네가 있지 않는가. 자네가 반란군 쪽으로 서지 않는 이상... ‘갓슈!!’ ㅇ..알겠네.. 알겠네... 하지만 그 정도로 본인은 자네를 믿고있는 것이야.]

갓슈는 그 날을 회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제온은 나의 마지막 말에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울지도 웃지도, 그렇다고 화내지도 않았다.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을 꼭 안아주며 ‘평생을 바쳐 널 지켜줄게.’ 라고 속삭여주었다. 그 때 얼마나 기뻤는지. 다른 누군가가 다 배신을 하더라도 제온은 자신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거란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됐나. 3차 반란 때 결국 자신을 지키다가 떠나버렸다.
그래, 단호하게 일을 처리해야했다.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자신이 즉위하고 7년째 되는 해에 2번, 10년째에 1번. 만약 1차 반란 때 그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처형했다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시르헨 또한 감히 생각을 못했겠지. 그럼 제온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사태가 자신때문인 것 같았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스가 조용히 다가와 갓슈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지금 내려가겠네. 준비할 필요는 없으이. 교도관들에게 보고만 내려두게나.”

그에 어스와 브라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집무실 밖을 나갔다. 갓슈의 방에서 나가자 어스가 얕은 숨을 토해냈다. 턱 아래로 흐르는 한 줄기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갓슈가 작정하고 (지금 갓슈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내뿜으면 질식할 것 같이 무거웠다.

“저 녀석들 정말 죽은 목숨이군.”

브라고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나가자 갓슈는 이내 멍하니 다시 앉아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일이 있을 땐 미친듯이 일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일이 끊기면 멍해졌다. 지난 1주일동안 많이 방황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듀포 앞에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으나 그가 따뜻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면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자신을 보살피랴, 듀포도 살피랴 바쁜 키요마로에게도 미안했다.
갓슈는 자신의 책상 위에 엎어져있는 액자를 다시 살며시 들었다. 제온이 죽고 나서 도저히 보기 힘들어 엎어놓은 사진이었다. 2년 전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게이트를 완성시키고 나서 찍은 기념사진이자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이었다. 근 2년동안 너무 바빠 사진 한 장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사진 속에는 자신이 제온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겨있는 상태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온은 카메라를 향한 상태로 못 말린다는 듯 작게 미소짓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그의 손을 올려놓은 상태로. 이 사진은 그 날 키드가 찍어준 사진이었다.
갓슈는 손가락으로 제온의 얼굴을 쓸었다. 자주 웃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지어주던 미소는 너무 따뜻했다. 그 미소가 보고싶어 더 열심히 일했다. 잘못하거나 처리를 잘 못하면 어김없이 불호령을 떨어뜨리는 그였지만 그 만큼 잘한 일에는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작게 웃으며 ‘정말 잘했어, 갓슈.’ 라고 말해주었다. 이제는 다시는... 다시는 그 미소를 보지 못한다. 사진으로밖에 남지 않았다. 갓슈는 품에 액자를 그러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

지하감옥은 총 13층으로 이루어져있다. 층이 깊을수록 중죄를 지은 자들이 수감되었다. 갓슈가 즉위한 이후로 7층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갓슈의 명령 중 하나는 바로 반란군들을 잡아들이는대로 지하 13층에 집어넣으라는 (갓슈가 정확하게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답지 않은 단어선택에 레이라는 처음에 살짝 놀랐다.) 것이었다.
지하13층은 깊이만큼 산소도 부족해 지내기 쉬운 곳이 아니다. 마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산소를 호흡에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 깊이가 깊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압 또한 높은 편이다. 그렇기에 그 쪽에서 수감자들을 지키고 있는 교도관들은 마력 결정석을 하나 가지고 다니는데 그 결정석 덕분에 수월하게 호흡할 수 있으며 기압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갓슈 벨 폐하를 뵙습니다.”

교도관들이 갓슈에게 예를 차리며 인사했다. 갓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갓슈의 뒤에는 브라고와 아슈론이 서있었다. 세 명이 서있는 것 만으로도 느껴지는 중압감에 13층 수감자들은 점차 호흡이 가파지는 것을 느꼈다. 저 순하디 순한 왕이 자신들을 13층에 가두는 것부터 뭔가가 잘못됨을 느꼈지만 그래도 마음 속에 조그만 희망은 품고 있었다. 1,2차 반란도 그런 처분을 내렸으니 이번 3차도 유하게...

“죄를 조목조목 따질 필요도 없네. 처형, 중간계로의 추방. 둘 중 하나일세.”

갓슈가 차가운 눈으로 수감자들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레이라에게 받은 리스트에서 본 반란군들은 총 34명. 감옥에 수감된 자들은 33명. 남은 1명은 제온이 직접 처리한 시르헨이다.
갓슈는 그들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2차 때 자신이 용서해준 자였다. 얼굴이 심하게 굳은 채 덜덜덜 떨고 있는 그를 보며 갓슈는 조소를 띄웠다.

“브라고, 아슈론. 교도관들을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가게.”

“…예, 폐하.”

아슈론이 교도관들에게 눈짓했다.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이 갔다. 갓슈의 진정한 힘을 모르는 저들에게 살짝 연민의 감정도 들었다. 그러게, 받아준다고 했을 때 확실히 돌아왔어야지.

“ㅍ...폐하... 자비를...”

“자비?”

이윽고 모든 이들이 윗층으로 올라간 것을 느낀 갓슈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항상 따뜻하게 빛나던 금안은 어느새 가라앉아있었다. 아니, 그의 금안이 빛을 잃은지는 오래되었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는 갓슈의 얼굴은 얼핏 보면 제온같았다. 둘은 쌍둥이니 얼굴도 똑같았지만 항상 웃던 갓슈가 작정하고 분위기를 내리니 제온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자비는. 이미. 본인이. 자네에게 주었네. 3년 전에 말일세.”

뚝뚝 끊어말하며 한 발자국씩 철창쪽으로 다가왔다.

“본인이 어리석었네. 제온 말대로, 1차때 강한 모습을 보였어야했어. 그럼 자네들이 날 업신여길 일도 없었을테지.”

“재상이!! 재상이 죽지 않았다면!! 폐하께서는 이와 다른 처분을 내리셨겠지요! 상황이 달라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다니 성군이 되기엔 아직 어리숙한 것 같사옵니다, 폐하.”

미친놈이??? 패기롭게 소리친 한 반역자들을 두고 남은 32명이 속으로 외쳤다. 반역을 일으킨 만큼, 또 성공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반역이 실패한 만큼 실망도 컸으나 그렇다고 저렇게 죽기 전 개소리를 하는 경우도 처음 본다. 엄청난 전격이 떨어질 것 같았던 것과는 달리 갓슈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소리친 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자였다. 아니, 그는 갓슈가 즉위식을 할 때 쯤 제온에게서 주의를 받았던 자였다. 아바마마께서 집권하실 때에도 낌새가 좋지 않았던 자라고. 하지만 곧 눈에 보이지 않기에 신경쓰지 않았는데 저기 가담하고 있었나.

“자네 말이 맞네. 만약 제온이 죽지 않았더라면 난 자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용서하려했겠지. 허나...”

파앙!!
갓슈가 마력을 내뿜었다. 전격을 가득 품은 마력은 곧 13층 전체를 미친듯이 눌렀다. 그들 중 마력감지에 예민한 마물 하나가 스스로의 마력을 갈무리하지 못하며 몸을 덜덜덜 떨었다. 그러나 굳이 그런 마물이 아니더라도 그 층에 있는 마물들은 갓슈의 농도 짙은 마력에 숨을 쉬지 못했다. 10년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왕의 마력. 그 엄청난 마력에 그 층은 갓슈의 힘 아래에 있었다. 12층에서 기다리던 브라고와 아슈론도, 갓슈의 마력에 몸을 떨었을 정도다. 이래서 교도관들을 윗층으로 보낸 것이었다.

“내가 이전에 유한 처분을 내린 것도 제온이 본인의 곁에 있었기에 가능했다고는 생각 안드나? 내가 제온에 예민한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를 해하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그 나쁜 머리로 깨닫도록 하시게.”

마력을 더욱 방출했다.

“그리고 자네, 꽤나 건방진 말을 하는구려. 상황이 달라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행동도 다르게 해야하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갓슈의 마력에 눌린 마물들은 고개를 숙이고 진정되지 않는 몸을 계속 떨었다. 아까 패기롭게 말하던 그 자 또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뜯었다. 갓슈의 마력은 전격이다. 마력의 농도가 높아질수록 포함된 전격 또한 많아진다. 이미 한 놈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새파래졌다. 안그래도 부족한 산소가, 마력에 의해 밀려 더욱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갓슈는 이러한 자신의 힘을 숨겼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다. 다만 갓슈처럼 엄청난 마력을 가진 자는 그저 서있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조성한다. 예민한 마물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컸기에 갓슈는 힘을 조절하는 능력을 제온에게서 배웠다. 제온 또한 가진 힘이 컸으나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일반 마물들이 보면 갓슈보다 제온이 더 강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갓슈는 별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알 사람들은 갓슈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반역자들도 하나 착각한 것이 있었다. 재상 제온이 죽으면 왕을 처리하기가 쉬워질 것이라는 착각. 항상 재상의 보호를 받으며 하하호호 자라나는 화초라고만 생각했다. 항상 느낄 수 있었던 마력도 제온이 훨씬 강했다. 왕위쟁탈전 당시 갓슈가 이긴 것은 역시 파트너 덕이 크다 라고 생각했다. 힘을 숨기고 있는줄도 모르고 어리석게 말이다. 아까 갓슈가 한 말이 맞았다. 갓슈가 제온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제온을 처리할 계획을 세웠던 것은 그의 죽음에 정신이 나갈 왕을 그제서야 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갓슈가 제온의 죽음에 의해 며칠을 방황했으나 만일 사태가 진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친히 그들을 벌하러 전장으로 나갔을 터였다. 다른 자들은 제온의 브레이크 역할을 갓슈가 해주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떤 방면에서는 제온이 갓슈의 브레이크 역할이자 역린이었기에.

“이제 나에겐 반역에 대해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어졌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내가 그냥 넘어간다면 자네들은 또 일을 저지르겠지. 이번에는 제온이었지만...”

갓슈의 눈시울이 따가워졌다. 잠시 흔들리는 마력을 느낀 자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갓슈의 차가운 눈과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는 누가 될지 모르지. 내 소중한 이들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하네만. 내 그것만은 반드시 막을 것이오.”

어스.브라고.레이라.레인.아슈론.티오.웡레이.칸쵸메.우마곤.코루루. 또 다른 친구들. 그리고 소중한 파트너 키요마로와 제온의 가족인 듀포까지. 더 이상 잃을 수 없다. 이미 절망은 충분히 겪었다. 또다시 겪고싶지 않았다. 두 번이다, 두 번! 밑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감정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눈 앞이 새카맣게 변하며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혼자 남겨진 기분은 이미 인간계에서 한 번, 마계에서 한 번 겪었다.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내 친히 중간계를 열어 추방시키고 싶지만 법률에 위반되는 사항이니 참도록 하지.”

갓슈가 마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숨을 트는 소리와 쿨럭쿨럭 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덜덜 떨 자들이, 뭣도 모르고 설치다니. 이 깟 놈들 때문에 제온이...!!

“날짜가 정해질 때까지 공포에 떨며 사무치도록 하시게나.”

갓슈가 일정량의 마력을 13층에 깔아놓은 상태로 뒤돌아 윗층으로 걸어나갔다.


**

갓슈는 지하감옥에서 올라온 뒤 교도관들에게 자신의 마력 결정석을 나누어주었다. 깔아놓은 마력은 교도관들에게도 상당히 위험할 터였다. 그 뒤로 그는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감옥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한 탓에 꽤 어둑해진 방 안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었다. 불을 켜자 언제나 똑같은 풍경에 갓슈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닌 제온의 방이었다.
갓슈는 느릿느릿 걸어가 제온이 쓰던 책상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제온의 방과 집무실을 절대 치우지 말라고 당부한 터라 그의 방은 먼지 한 톨 없이 잘 보존되어있었다. 죽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갓슈는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여러 액자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보았다. 자신의 즉위식 때 처음으로 가족과 다 같이 찍은 사진. 5년 전 라.피에타 당시 듀포와 둘이 찍은 사진.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2년 전 게이트 앞에서 찍은 사진까지 총 3개였다. 사진 찍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그였기에 10년동안 찍은 사진이 거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을 많이 찍어둘걸 그랬다. 또 눈물이 흘렀다. 주체할 수 없을만큼 흐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손으로 막아보려해도 소용 없었다. 이제 3차 반란은 내일 판결을 마지막으로 정말로 끝을 맺을 것이다. 정말, 끝이다. 제온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막았던 반란이.
사실 지하감옥에서 더 일을 벌리고 싶었다. 전격을 하나하나 꽂으며 고통을 주고싶었다. 가증스럽게도 뻔뻔하게 여유부리고 앉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올랐는지. 위에 교도관들과 브라고들이 없었다면 이미 지하13층은 전격으로 초토화 시켰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자신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평생 아물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깊었다. 너무나도 분했고 너무나도 속상했으며 너무나도 슬펐다.

“으흑...으윽...제온...! 제온...!!”

바닥으로 몸이 무너져내렸다. 이제 자신은 체통이고 뭐고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 방 주인이었던 자가 정말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갓슈. 부드러운 목소리로 키요마로가 이름을 불렀다. 갓슈는 그에 키요마로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파트너. 제온 못지않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도 인간계에서 한 번 잃을 뻔 했다. 하나 남은 반신을, 이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킬것이다.

갓슈는 키요마로의 품에 안겼다. 평소같으면 징그럽다며 떼어냈을 그였지만 오늘은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갓슈는 키요마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키요마로와 제온은 마음의 조각이 똑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처음 즉위식 때 제온이 갓슈를 안아주었을 때, 마치 키요마로가 안아주는 것처럼 든든했다. 또한 지금 키요마로가 자신을 안아주는 것이 마치 제온이 안아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요마로... 키요마로...!”

“갓슈. 난 여기 있어.”

“본인이 한 행동이 맞는지... 맞는지 모르겠네... 난...난...!”

“갓슈. 그 누구도 널 원망하지 않아.”

키요마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키요마로가 아까 브라고를 우연히 만났을 때 아마도 중간계로 유배시킬 것 같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 형은 마계 최고형벌에 속한다는 것까지. 마음이 복잡했으나 갓슈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이렇게 품 안에서 울고있지 않은가.

“본인은... 본인은... 상냥한 왕이 되고싶었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진정한 듯 울음이 좀 잦아들고 갓슈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노력했으이. 낮은 자들을 먼저 챙기고... 다른 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네.”

“…….”

“상냥한 왕이 되면, 다들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네. 하지만 이게 뭔가...”

갓슈가 키요마로를 안은 팔을 더욱 단단히 했다.

“이게... 상냥한 왕이 되기 위한 댓가라면...”

갓슈가 중얼거렸다.

“……상냥한 왕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제온을 돌려달라고 하고싶네.”

그건 갓슈의 진심이었다.



같은 시각. 듀포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온의 묘에 가지런히 앉아 꽃을 다듬었다. 파티라는 여성이 제온의 공개분향소 때 받았던 꽃들을 정리해주었고 그 꽃들을 제온의 묘에 꾸미고 있었다. 꾸민다기보단 정돈한 다음 비석 앞에 놓아두는게 다였지만. 좋겠네, 제온. 꽃 많이 받아서. 너 꽃 좋아하잖아. 듀포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갓슈와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1주일 넘게 장식한 결과 비석 앞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랫동안 장식된 꽃 중에는 조금 시든 것도 있었기에 그런 것 또한 정리하였다. 오늘 다듬을 꽃은 노란 꽃잎을 가지고 푸른 술을 가진 신기한 꽃이었다. 작은 크기의 꽃은 양이 매우 많아 풍성한 다발을 이루고 있었다. 장례식을 포함하면 2주가 다 되어가는데도 파릇파릇했다. 생명이 긴 꽃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잔잎을 치기 시작했다.

“어머, 내가 준 꽃이네.”

옆에서 들려오는 앳된 여성의 목소리에 듀포는 무의식적으로 돌아보았다. 늦은 저녁이라 어둑해진 탓에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빛이 있는 곳까지 다가오자 그녀 특유의 웨이브 진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지 알아차리는 순간 듀포는 드물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체릿슈?"

"안녕, 제온의 파트너."

체릿슈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5년 전에도 본 테드라는 남자가 서있었다. 키가 훌쩍 커 체릿슈보다 더 커진 그는 몸도 더 단단해졌다. 세삼 5년이라는 시간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녀는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지금 듀포가 다듬고 있는 꽃과 똑같은 꽃다발이었다. 흰색 포장지로 곱게 싸 금색 리본으로 고정해놓은 꽃다발이었다. 노란 꽃잎과 푸른색의 술. 마치 체릿슈와 이 꽃이 닮은 것 같았다.

"그 꽃 아직도 안시들었네. 역시 세피꽃이야. 시들었을 것 같아서 새 꽃으로 가져왔는데."

체릿슈가 어느새 듀포의 옆에 다가와 앉으며 비석 앞에 꽃다발을 놔두었다.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온 그녀를 자세히 보니 길었던 머리를 자른 듯 했다. 항상 골반 아래까지 풍성한 곱슬머리를 자랑하던 머리카락이 어깨 정도에서 찰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듀포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꽃을 다듬는데 집중했다.

"나 말이야. 거짓말같아."

체릿슈가 입을 열었다. 그에 듀포는 다듬던 손을 멈추고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드는 묘한 표정으로 체릿슈의 뒤에 서있었다.

"뭐가."

"제온이 떠난거. 네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닌 걸 알지만, 나 아직도 믿기지 않아."

체릿슈와 제온. 이 둘은 최악의 만남이었다. 제온은 파우드의 세포를 받지 않은 체릿슈를 바르길도.자케루가로 고문했고 엄청난 PTSD를 남겨 가족인 테드를 공격하게 했다. 나중에 컨트롤룸에서 제온의 번개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긴 했지만 아직도 그녀는 사실 갑작스런 정전기에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그리고 그 만큼 체릿슈는 제온의 강함을 몸소 경험했다. 저 기고만장한 왕자님이 어디서 때릴지언정 맞을 위인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 또한 제온의 죽음을 신문을 통해 들었을 때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내가 왜 제온을 용서했는지 알아?"

체릿슈가 듀포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듀포는 이미 체릿슈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었다. 듀포가 무언으로 대꾸하자 체릿슈가 입을 열었다.

"제온말이야, 모든 싸움이 끝나고 3개월 뒤에 나를 찾아왔어. 이건 들었지?"

"아아. 너가 처음에 문전박대했다는 것까지 들었다."

"뭐라구??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건 다 제온이 선물만 달랑 보냈었기 때문에 어이없어서 화낸거야. 제온 저녀석, 허풍이 심하네."

체릿슈가 볼을 빵빵하게 채우며 대꾸했다.

"아무튼, 나중에는 진짜로 찾아와서 사과하더라고. 그 때 제온이 이렇게 말했어. 자기가 날 찾아온 이유는 용서받기 위함이 아니라고. 용서하는 것은 내 몫이지, 자기가 강요해야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더라.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대.
...한 대 맞은 기분이었지. 그 때의 그 제온이 맞나, 갓슈가 제온 분장을 하고 찾아온건가 싶었어."

지금은 가볍게 말하지만 그 땐 진짜 놀랬다구. 체릿슈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 곧바로 용서하지는 못했지만. 5년 전 라.피에타에서 다시 만난 제온은 엄청 바뀌어있더라. 갓슈의 영향도 있겠지만."

체릿슈가 고개를 돌려 비석을 바라보았다.

"뭐랄까. 제온이 누군가를 지키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것 같아보였어. 실제로도 그랬고."

"......"

"또 엄청 무뚝뚝한 사과도 2번이나 더 받았고."

"제온 이 녀석, 정말 징하네."

"하하하. 맞아. 오히려 부담스러워질 정도였어."

체릿슈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표정이 아련해졌다. 마치 옛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행복해보였는데. 2년 전에."

"......"

"나 볼 때마다 쭈볏거리는게 은근 재밌어서 자주 놀렸는데."

"......"

듀포는 잠자코 체릿슈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집 지을 때, 제온이 우리 모르게 일 처리해준것도 뒤늦게 알았는데..."

체릿슈의 뒤에 서있던 테드가 일렁이는 그녀의 마력을 눈치챈 듯 그녀의 왼쪽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체릿슈.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체릿슈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어깨에 놓인 테드의 손을 잡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가 작게 어깨를 떨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 이미 용서했다고... 그러니 더 이상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제온은 유독 체릿슈 앞에서는 죄인이었다. 그런 그를 체릿슈가 모를 리 없었다. 처음에는 유난떤다고 생각하고 상대하지 않았지만 정말 바뀐 그의 모습에 놀란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갓슈가 지나가는 말로 '제온이 자기 스스로 절대 바르길도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땐 조금은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체릿슈 모르게 제온은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쉽게 허가증이 나오지 않는 8지구 건축허가서를 직접 처리한 것도 제온이었고 알게모르게 그녀 가족들을 막 대하는 고용주들을 조용히 처리한 것도 제온이었다. 제온은 딱히 알아달라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고 체릿슈 또한 그가 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게된 건 3년 전이었다.
그 이후부터 체릿슈는 제온에게 '용서했다.' 라는 말 대신 행동으로 조금씩 보여주었다. 익살스럽게 놀린다던가, 장난을 친다던가 하는 행동들이었다. 제온이 유일하게 쭈볏거리는 사람이 체릿슈였기에 은근 즐겁기도 했다.
이렇게 10년만에 보낼거였으면... 여태까지 챙겨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용서했다고 한 마디라도 해줄걸.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듀포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

처분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얼른 처리하라는 브라고의 압박도 있었으나 반역자들 가운데 재범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 또 밝혀져 마계 전체가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당장 사형시켜야한다는 여론부터 어째서 저들이 반역을 저질렀는지 분석하는 자들도 나왔다.
전원 추방
중간계로의 추방이 판결되었다. 티오는 보고서를 읽자마자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제 갓슈가 감옥에 내려가 한바탕 했다더니 바로 다음날 판결이 날 줄은 몰랐다. 브라고와 어스가 어지간히 판관들을 들볶았나보다.

“오늘 오후에 추방한대.”

칸쵸메가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 판결이 오늘 났는데 오늘 추방??”

“...갓슈가 직접 문을 연다고 하더군.”

웡레이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왕이 친히 중간계로 가는 문을 연다고? 티오는 얼빠진 얼굴로 웡레이를 바라보았다.

“갓슈가...?”

“응. 비공개로 한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갈 수 있는 자는 근위대장직 까지야.”

즉 기사단장 신분인 이들은 참석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엄청나게 보고싶다! 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짓을 저지른 자들의 최후는 보고싶었는데. 티오가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다.

처형식은 속히 진행되었다. 중간계란 마계와 인간계 사이에 끼어있는 공간이다. 말 그대로 끼어있어 인간계의 영향과 마계의 영향을 둘 다 받는 곳이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도 있고 빠르게 흐르는 곳도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일그러진 공간이다. 죄수들이 중간계로의 추방과 사형 중 뭘 선택할거냐 라고 하면 두말할 것 없이 사형일 정도로 최고형벌에 속한다. 그리고 그 곳을 여는 게이트는 엄청난 에너지와 섬세한 마력컨트롤을 요하기 때문에 여는데만 해도 3일은 족히 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갓슈는 그 문을 반나절만에 열어버렸다. 왕이 친히, 손수. 마력 구속구를 찬 상태로 병사들에게 끌려가 중간계로 떨어지는 반역자들을, 갓슈는 끝까지 지켜보았다. 자비를 베풀어달라 사정하는 이들도 있었고 가지 않으려 버티는 자도 있었고 다 포기한 듯 끄는 대로 끌려가는 이도 있었다. 처형장에는 33명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마지막 한 명이 추방되고, 문이 닫히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으며 갓슈가 일어났다.

"뒷정리를 부탁하네, 레이라."

"그래, 알았어."

옥좌에서 내려와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갓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옥좌 근처에는 그 누구도 올 수 없기 때문에 갓슈는 옆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 버텨야했다. 갓슈에게서 가장 가까이 서있는 자는 키요마로와 듀포였다. 갓슈의 상태를 본 둘은 갓슈에게 당장 다가갔다.

"갓슈, 괜찮아?"

"아... 괜찮네. 중간계를 여느라 너무 집중한 탓이니 걱정 말게."

갓슈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이제 정말 끝났다. 마지막으로 갓슈는 제온의 묘에 가보고 싶었다. 장례식 이후로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지 못했다. 자신은 또 한 번 무너질 것만 같았기 때문에 너무 두려워 가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제온의 곁에 있고 싶었다. 너무 지쳤다. 그는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며칠동안 혹사시킨 몸과 정신은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엄청난 휴식을 요구했다.

"갓슈...? 갓슈!!!"

그대로 갓슈가 쓰러졌다.


**

눈을 떴다. 눈커풀이 무거웠다. 빛이 들어와 시야를 순간적으로 가렸다. 이윽고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색으로 장식된 침대의 천막. 눈을 전부 뜨고 앉자, 자신이 있는 곳이 침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갓슈의 방이다.

"어이, 갓슈. 오늘따라 왠 늦잠이야."

어...? 갓슈가 움직이려던 몸을 순간 멈추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다. 최근의 기억과 비교하면 목소리가 조금 이질적으로 들리긴 하였으나 틀림없는...

"제온...?"

갓슈는 목소리를 내자마자 입을 헙 하고 틀어막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자신의 입을 막은 손도 이상했다. 포동포동하고 앙증맞은게 마치 어릴 때 자신의 손같았다.
촤라락 하고 침대를 가리던 천막이 걷혔다. 이미 침대머리 위 창문 덕분에 충분히 빛에 익숙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갓슈는 눈부심 없이 천막을 걷은 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새하얀 은발과 자주색 눈동자. 그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흰 망토에 브로치까지. 제온이다... 틀림없는 제온이다. 갓슈가 멍하니 자신을 보고만 있자 제온쪽에서 폭발했다.

"이 바보왕이! 오늘 아침에 회의있는거 잊었냐? 평소엔 일찍일찍 일어나던 놈이 하필 오늘 늦장이야?"

"제온...정말...제온이 맞는겐가..."

"하? 너 아직 꿈에서 안 깼냐? 얼른 안일어나??"

제온이 갓슈의 이불을 확 걷었다. 갑자기 온 몸으로 맞은 차가운 공기에 갓슈가 잠시 움츠렸다. 그러나 이윽고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온이 맞다. 저렇게 호통치는 것도, 저 눈동자도 모두 제온이 맞다. 틀림없다. 갑자기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한건 오히려 제온쪽이었다. 제온은 몸을 움찔하더니 갓슈에게 다가와 어설프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야... 목소리를 높인건 미안해, 갓슈. 울지 마."

"제온...제온....!"

따뜻했다.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그런 온기가 닿자마자 갓슈는 바로 제온의 품에 안겼다. 제온이 당황했는지 순간 마력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이윽고 자신을 마주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왜 그래, 갓슈. 악몽이라도 꿨냐?"

"우누... 정말, 정말 무시무시한 꿈이었네."

"무슨 꿈이길래 왕께서 이리 슬퍼하실까."

제온 자네가 내 곁을 영영 떠나가는 꿈. 갓슈는 이 말만은 내뱉을 수 없어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대신 제온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제온 또한 갓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온기, 이 손길. 얼마나 그리웠는가. 1주일동안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아무도 없는 제온의 침실에서 혼자 흐느끼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건 다 꿈이다. 정말 지독한 꿈을 꾼 것이다. 그 지옥같았던 시간들이 다 꿈이라는 사실에 너무나도 큰 안도감이 들었다.

"자, 이제 준비해야지. 갓슈,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라. 아침먹은 후 바로 회의 들어가자."

제온이 아직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에 갓슈는 환하게 웃었다. 우누!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 달려있는 욕실로 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제온은 나가서 기다리려는 듯 문을 열고 복도를 향해 나갔다. 아니, 복도로 향해 나가려고 했다. 갓슈는 욕실로 가려던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새하얬다. 복도였어야 할 풍경은 보이지 않고 온통 새하얀 공간 뿐이었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낀 제온이 문을 닫으려다 말고 갓슈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래, 갓슈."

갓슈는 말 없이 창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햇빛이라고 생각했던 환한 빛. 갓슈는 창문 바깥 풍경을 바라본 순간 반짝이던 금안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새하얬다. 바깥도. 여긴, 현실이 아니다.

"갓슈, 너 괜찮냐?"

제온이 이내 다가와 갓슈를 돌려세웠다. 그러나 이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갓슈는 울고 있었다. 아까처럼 악몽으로 인해 무서워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정말로 멍하니 눈물만 흘리는, 그런 처참한 모습이었다.

"갓슈...?"

"제온."

"갓슈, 너 왜 그래. 정신차려."

제온이 갓슈의 어깨를 붙잡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갓슈는 아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반역자들을 중간계로 보내고, 자신이 쓰러진 것 까지 모두 기억났다. 아... 이거야말로 꿈이구나. 내 앞에 있는 이 형제는 실제가 아니구나.

"제온, 본인이 아까 악몽을 꾸었네. 자네가 날 지키려다 영원히 내 곁을 떠나버리는, 그런 꿈이었네."

"...갓슈."

갓슈가 조용히, 천천히 제온에게 안겼다. 아까처럼 말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강하게 껴안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저렇게 새하얀 풍경이 아니었다면 진짜라고 믿을 정도로 생생한 온기였다. 제온이 한 손으로는 갓슈의 등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 꼬옥 안았다. 등을 일정한 속도로 토닥여주자 다시 갓슈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제온, 정말 좋아하네. 너무나도 사랑하이. 자넨 내 사랑하는 형이자 친구일세."

제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말은 꼭 전해주고 싶었네. 꿈에서, 본인은 자네에게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 한 마디조차 해주지 못했어."

"갓슈, 네가 날 소중히 여긴다는건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어."

갓슈가 제온의 품에서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말라는 듯 갓슈의 머리에 제온이 기대는게 느껴졌다. 어느 새 자신과 제온은 어릴 적 모습이 아닌 18세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갓슈."

갓슈의 방이었던 공간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난 언제나 네 곁에서 널 지킬테니."

하얀 공간은, 어느새 다시 어두워졌다.
갓슈가 다시 눈을 떴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 품 안에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자넨 이런 식으로 인사하는구려. 속으로 갓슈가 제온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이젠 정말 닿지 못할 말이었다.

"갓슈."

어둑한 방 안에서 깬 갓슈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맡에 있는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는게 보였다. 그리고 그 달빛은, 제온의 파트너인 듀포가 받고 있었다. 갓슈가 몸을 일으키자 반대편에서 키요마로가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듀포. 내 몇 시간을 잔겐가."

"잤다기 보다는 쓰러졌지. 정확하게 14시간이다. 티오가 난리났었어. 네 몸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못했거든."

"걱정 끼쳐버렸구려. 미안하네."

갓슈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듀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키요마로는 이제 인간계로 가야해."

"아... 그렇구려. 거의 2주가 지났지 않나. 신세를 많이 졌네."

"딱히."

듀포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며 대꾸했다. 갓슈는 손과 발을 꼼지락거리며 상태를 체크했다. 침대 옆에 치유의 진이 쳐있는 것으로 보아 라피넬도 다녀간 듯 했다.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갓슈는 침대에서 내려가 엎드려 자고있는 키요마로를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침대에 살며시 눕혔다. 그는 이내 옷장에서 검은 망토를 꺼낸 후 몸에 걸쳤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저절로 두게 된 듀포는 외출하려는 듯한 갓슈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라피넬이라는 사람이 너 푹 쉬어야한다고 하더군."

"아, 걱정말게.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닐세."

갓슈가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쳐다보았다. 새벽 3시였다.

"...제온에게 잠시 다녀오려 하네. 같이 가겠는가."

"아니, 괜찮아."

"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들린 대답에 갓슈가 의아함을 표했다. 그에 듀포는 작게 미소지으며 다시 시선을 창 밖의 달로 두었다.

"1주 반동안 매일 다녀왔다. 할 말은 다 건넸어. 형제끼리의 시간을 방해하고싶지도 않고. 게다가..."

"......"

"또 만났어. 오늘."

그 말을 하는 듀포의 표정은 어쩐지 조금 슬퍼보이기도 했고 굳은 결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제온이 자네에게도 찾아갔구려."

"...그래."

갓슈는 작게 미소지어주었다. 듀포의 시선은 밖을 향해있었기 때문에 갓슈의 미소를 보진 못했지만. 갓슈는 이윽고 조용히 문을 열고 제온을 또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갓슈는 망토를 좀 더 여미며 길을 걸어갔다. 군데군데 불침번을 서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졸거나 다른 기사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가 갓슈가 보이자 이내 예를 차리고 경례하였다. 그 중 라진이 보였다. 중장급인 그가 불침번을 설 리는 없어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갓슈벨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옥체는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라피넬과 티오가 수고해주었으이. 그건 그렇고 자네가 이 시간에 왠일인가.”

“예, 폐하. 그게...”

라진이 드물게 우물거렸다. 항상 일도 시원하게 처리하고 말도 거침없이 하는 그였기에 이상했지만 갓슈는 하나 짐작가는 일이 있어 잠자코 기다렸다.

“…제온님을 뵙고 오는 중입니다.”

라진이 대답했다.

“하하. 그게 뭐라고 그리 우물대는겐가. 우연이구려. 나도 지금 제온에게 가는 중이네.”

“예? 호위 하나 두지 않으시구요! 토히, 얼른 폐하의 경호를...”

“아닐세, 라진. 괜찮네. 오랜만에 형제끼리 있고싶네만.”

허나 폐하... 라진이 뒷말을 흐렸다.

“…그리고 라진. 자네도 많이 힘들지 않나.”

라진은 외부 출장으로 인해 제온의 분향과 발인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 사실 때문에 라진은 돌아오고 나서 굉장히 괴로워했다. 일부러 아무도 없는 새벽에 찾아가 혼자 울곤 했다. 라진은 제온을 어릴 때부터 거의 키우다시피 하였고 그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본 장본인이었다. 제온은 거의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임기가 다 되어 은퇴한 라진을, 제온이 딱 50년만 더 해달라고 부탁해 아직 중장직에 있었던 것이다. 재상이 되어 점차 멋있게 성장해가는 왕자님을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행복했는데. 라진은 제온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참담한 기분을 떠올렸다. 하지만... 저 어린 왕의 슬픔에 감히 비할 수 있을까.

“폐하. 폐하의 슬픔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닐테지요.”

“그런 말 하지말게. 제온이 들으면 아마 화낼지도 모르네. 제온이 자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는 알고 있으이.”

갓슈의 말에 라진이 순간 울컥하였다. 이제 늙고 힘이 빠져버린 은퇴한 중장을, 믿고 50년을 더 부탁한건 왠만한 신뢰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만큼 제온은 라진을 좋아했다. 앞에서 틱틱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믿고 따른 유일한 자였다. 갓슈는 어릴 때 제온으로부터 라진에 대해 많은 말을 들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실례하였습니다, 폐하.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우누. 수고하시게, 라진 중장. 그리고 자네들. 내 호위는 오지 말게. 제온과 둘이 있고 싶으니. 죄를 묻거나 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시게나.”

갓슈가 호위를 서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기사들을 향해 덧붙였다. 원체 법률에, 왕을 혼자 두어서는 절대 안된다. 무조건 옆에 누군가는 호위를 하여야 하며 만약 혼자 있는 왕을 보았는데도 그냥 둔다면 징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갓슈는 그러지 말라고 한 것이다. 기사들은 알겠다는 의미로 거수경례를 해보였다.


보름달이 떴다. 새벽 3시가 넘은 때에는 하늘 정 중앙에서도 조금 기울어져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온의 묘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달은 제온의 뒤를 비춰주고 있었다. 어릴 때 인간계에서 본 보름달은 꽤나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키요마로는 그 모습을 보며 빛의 산란과 햇빛의 반사 이런 말들을 했었는데 그 때의 갓슈는 너무 어리기도 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마계의 달은 너무나도 하얬다. 하얗다못해 푸른 빛이 도는 것 같았다. 크기도 더 컸다. 더 큰 만큼 훨씬 더 밝았다. 갓슈는 달빛을 의지하며 제온의 묘에 다다랐다.

“오... 듀포가 해놓은 작품인가.”

제온의 묘는 예쁘게 꾸며져있었다. 묘를 꾸민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긴 했지만 알록달록한 예쁜 꽃들이 묘 앞에 그리고 그 주위에 장식되어 있었다. 공개분향소 때 받은 꽃들을 파티가 정리했다고 하는데 그 꽃을 이용한 것 같았다.

“예쁘구려. 마음에 드는가?”

듀포가 해주었는데, 당연히 자네 마음에 쏙 들겠지. 갓슈가 작게 웃었다. 몇 주만에 그리는, 억지웃음이 아닌 진실된 미소였다. 세피꽃 -꽃다발이 두 개라서 갓슈가 의아해했다.- , 달리꽃, 두미꽃, 소피꽃, 프리티꽃, 에뜨왈꽃 등등... 각양각색의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방금 라진이 두고 간 듯한 꽃다발이 하나 더 놓여져있었다. 미넬꽃이었다.
갓슈는 꽃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비석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앉은 키보다 조금 작은 비석을 한 번 소중하게 쓰다듬다가 이내 기대었다. 마치 어릴 때처럼, 제온에게 기대는 것 처럼.

“제온.”

갓슈가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 땅은 고요했다. 풀벌레소리만이 가득했다.

“자네가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네만, 난 자네를 따라가고 싶었네.”

진심이었다. 비록 주변에 남겨진 친구들과 자신의 파트너가 있었기에 따라가지 못했던 것 뿐 만약 혼자였다면 곧바로 제온을 따라갔을 것이다.

“우린 쌍둥이형제이지 않은가. 키요마로가 그러더군. 일란성 쌍둥이는 원래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뉘어져 태어난 것이라고.”

사실 분열과정도 키요마로가 설명해줬네만 난 아직도 이해할 수 없으이. 갓슈가 작게 웃었다.

“그래서 난 자네 옆에 있는게 너무 좋았어. 같이 있으면 편안했고 행복했네. 그거 아는가. 어릴 땐 사실, 자네 옆이 아니면 잠도 잘 오지 않았네. 처음엔 혼자 자는게 무서워 그런 줄 알았네. 허나 훗날 어마마마와 같이 잤을 때에도 뭔가 불편해서 잠이 잘 오지 않더구려. 하지만 자네 옆에서 자면 거짓말처럼 푹 잘 수 있었으이. 나중엔 어마마마가 아시곤 조금 섭섭해하셨지만 말일세.”

갓슈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무에게도, 제온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혼자 자면 무섭다는 핑계로 갓슈는 라.피에타 전까지 제온과 종종 같이 자곤 했다.

“그리고 자넨 같이 잘 때마다 축복을 읊어주곤 했지.”

왕족들만 할 수 있는 고유의 축복. 신관들도 할 수 없는, 왕족에만 내려오는 축복이다. 토에나, 소르티에 -언제나 시조의 축복이 있기를- 라며 운을 떼는 장문의 축복문이다. 제온이 어릴 땐 어머니가 종종 해주시곤 하셨던 것을, 나중엔 제온이 갓슈에게 해주었다. 왕인 갓슈에게 신하가 축복을 내린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었으나 제온은 신하이기 이전에 형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갓슈 또한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제온은 옆에 누워있는 갓슈의 머리를 쓰다듬고 낮게 축복을 읊조려주었다. 그 축복을 빌어주는 형이 너무 좋았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은 자신도 축복을 빌어주고싶어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생각보다 긴 축복문을 다 외우지 못해 기도가 끊겨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제온이 그 때 크게 웃음을 터뜨렸었지. 괜스리 생각나는 옛 기억에 갓슈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러고보니 자네는 내가 인간계로 갈 때도 축복을 빌어주었구려.”

제온이 시르헨의 반역을 저지하기 위해 갓슈를 인간계로 대피시킬 때. 게이트 문 앞에서 갓슈를 꼭 안고 축복을 읊었다. 그 때 갓슈는 제온이 자신을 혼자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것 때문에 불안해서 걸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때 이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축복 덕분인지 갓슈는 무사했지만 말이다.

“정말 자네는 내 걱정 뿐이구려.”

정작 자신의 몸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제온... 보고싶으이.”

기어코 눈물이 나오고야말았다. 아까 꿈 속에서 제온을 보았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꿈을 꾼다해도 곧잘 잊어버리는 자신인데도, 오늘 꾼 꿈만큼은 감촉도, 온기도 생생했다. 제온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얼마나,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는지. 모든게 꿈인걸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자네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나에게 왔던겐가.”

갓슈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오늘은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고싶었다.

“고맙네. 마음이 조금 정리된 듯 하네.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나에게 찾아와주게.”

갓슈가 제온.벨이라고 적힌 부분을 손끝으로 쓸었다.

“마치 내 신체 일부 중 하나가 떨어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려.”

갓슈의 품에서 제온이 죽었을 때의 기분이었다. 내 신체가 사라진 기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이 기분. 피를 나누고 살을 나눈 쌍둥이다. 하나가 둘로 나뉘어져 태어난 둘은 비록 인간계에서는 악연이었지만 마계로 돌아오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난... 아직도 자네가 필요한데... 자네에게 배울게 많이 남았는데도...”

갓슈가 비석을 꼭 안았다.

“정말 고맙네, 제온. 난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게야. 아직 기초도 다 떼기 힘들었겠지. 내가 자네에게 계속 어리광을 부렸는데도 다 받아주었어. 자네가.. 자네가 근위대장직을 원하고 있다는걸 알았는데... 알았는데 재상직에 임명했는데도... 그럼에도 수락해주어 너무 고맙네. ”

갓슈는 충분히 강하고 온화한 성군이었으나 그를 성장시킨건 제온이었다. 그에게 궁 예법과 식사예절, 검술을 가르쳐주고 순간이동, 머리카락으로 물건 만들기 등을 가르쳐주었던 것도 제온이다. -물론 아직 갓슈는 순간이동을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갓슈도 곧잘 따라와주었지만 그래도 1등공신은 제온이다. 또 제온은 갓슈의 어리광에는 조금 약한 면이 있었다. 무리하다싶은 부탁도 갓슈가 올망올망한 눈동자로 부탁하면 제아무리 뇌제 제온이라 해도 결국은 들어주고 만다. 갓슈는 그런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맙고... 사랑하이...”

갓슈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모든 일이 끝났네. 자네가 막으려던 3차 반란이 드디어 끝났으이. 나는 무사하고, 반란군들도 처분했지. 그러니...”

갓슈가 비석에 기대어있던 몸을 뗐다.

“그러니 편히 쉬게나. 제온.”

갓슈는 비석을 한 번 크게 쓸었다. 그리고는 윗부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비석 앞에서 서서 싱긋 미소지었다. 제온이 마주웃어주는 것만 같았다.
‘또 오겠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방으로 돌아가기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

“키요마로님, 듀포님.”

키요마로와 듀포는 갓슈의 방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간계로 돌아가기 전 갓슈와 다른 친구들이 바래다주기로 하였기에 그 쪽으로 가서 같이 이동하려 했는데 그들 앞을 누군가가 막았다.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자는 누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멋대로 막아서 죄송합니다. 용서를. 저는 제온 님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사라하 라고 합니다.”

사라하 라는 남자는 짧고 짙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단정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상복이다. 마계의 규칙 상 왕족이 죽으면 왕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1달동안 상복을 입어야했다.
제온의 보좌관이라는 말에 듀포의 눈썹이 잠시 움찔했다. 제온이 보좌관을 둘 성격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량에 한 명 정도는 두어야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결국 한 명 둔 듯 했다.

“다름이 아니라 제온님께서 저에게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부탁이오?”

“예. 실례지만, 제온 님의 파트너가 누구십니까?”

제온의 파트너가 누구냐고 묻고 있지만 눈은 듀포를 향하고 있었다. 분위기, 그리고 속을 읽을 수 없는 느낌까지 이 백발의 남자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라하의 예상은 적중했다.

“접니다.”

듀포가 손을 들었다.

“아, 그럼 이 검은 머리 분이 갓슈벨 폐하의 파트너, 키요마로이시군요.”

사라하가 품 안에서 봉투 두 개를 꺼내주었다. 하나는 듀포에게, 하나는 키요마로에게 각각 나누어주었다.

“…제온님께서 만약 당신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각각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전해드려야하나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행히 적당한 타이밍을 잡았군요.”

제온이 전해주라고 했다는 말에 듀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봉투 앞쪽에는 '듀포.' 라고 작게 적혀져있었다. 당장에라도 뜯어보고 싶었으나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바쁘실텐데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비록 이번에는 마음 아픈 일로 오셨지만 다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마계로 와주십시오. 감히 요청드립니다. 폐하께서도 그걸 원하고 계실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사라하의 말에 키요마로가 대답했다. 듀포도 봉투에서 시선을 떼고 사라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키요마로와 듀포도 마주인사하였다.




“아, 왔구려. 출발하기 전에 듀포에게 줄 것이 있네.”

오늘 뭘 많이 받는구나. 듀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갓슈가 듀포에게 건넨 것은 바로 작은 상자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는 은색과 자색 보석으로 장식되어있어 꽤나 화려했다. 안을 열어보니 재상위 브로치가 들어있었다. 재상임을 입증하는 브로치였다.

“…이젠 주인이 없네. 듀포, 자네가 보관해주게.”

“…….”

듀포가 한동안 브로치를 쳐다보았다. 라.파에타 마지막 날. 갓슈가 대관식 이후 정식으로 즉위하는 날이자 관료들이 정식으로 직위를 받는 날이었다. 이 날 제온은 이 브로치를 하사받고 정식으로 재상이 되어 갓슈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 날 제온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지. 동생을 지켜준다는 결의에 찬 모습, 그리고 지켜줄 수 있다는 기쁨. 두 가지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날, 듀포는 제온과 두 번째 이별을 했었다. 듀포는 브로치를 한 번 쓸었다. 동그랗고 반짝반짝 빛나는 브로치는 너무나도 화려했다. 재상을 의미하는 마수가 그려져있는 브로치는 이제 주인이 없는 것이다. 적어도 500년 동안은.

“이제 슬슬 가세나. 2주동안 정말 고마웠네. 키요마로, 듀포. 두 사람 덕분에 내가 버틸 수 있었네.”

“…갓슈.”

키요마로가 걱정된다는 듯이 이름을 불렀다.

“2주동안 성숙하지 못한 모습만 보여 미안하구려. 이제 난 버틸 수 있네. 난 혼자가 아니니까.”

“그래.”

키요마로가 갓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제온이 쓰다듬는 것 같아 갓슈는 편안해졌다.

“제온이 보고싶을 땐 보러 가고, 울고싶을 땐 울어도 좋다 갓슈. 하지만 무너지지는 마.”

듀포가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

“…언제든 인간계로 와라. 나도 마계로 종종 놀러갈테니.”

“알겠네. 이젠 무너지지 않을걸세. 그리고 마계로 오는 것은 언제든 환영일세.”

갓슈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안심이 된 듯 키요마로와 듀포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또 다시 조우하게 될 미래는, 지금보다 밝을 것이다.



듀포와 키요마로가 떠나고 갓슈는 하루정도 일을 더 쉬었다. 괜찮아진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잠시 정리할 시간은 필요했다. 눈물은 나왔으나 듀포의 조언대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동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갓슈가 다시 일을 시작하였을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사라하가 봉투를 건네주었다.

“폐하가 가장 마지막입니다. 재상 제온이 저에게 맡기신 편지입니다.”

“…제온이...?”

“예. 만약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폐하께 전해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받았습니다. 키요마로님과 듀포님은 이틀 전에 이미 받으셨습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구요.”

“왜 나에겐 늦게 전해준겐가.”

갓슈는 부드럽게 물었다. 꾸짖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사라하가 늦게 준 이유도 알 것 같았고.

“재상이 말하기를, 특히 폐하께 전해드릴 땐 많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구려. 전해주어 고맙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하이.”

사라하가 용건을 마친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갓슈는 편지를 들고 한동안 앉아있었다. 봉투 앞에는 '갓슈' 라고 적혀있었다.
저녁 6시 반. 모든 일이 다 끝나가는 시점에서 전달받은 편지. 갓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편지를 열었다.


갓슈.
내 동생. 우선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일이 절대 없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내가 내 손으로 태우길 바라며 한 글자 적어본다. 사라하가 이 편지를 전해주고 네가 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겠지. 하나는 내가 반란을 성공적으로 막았으며 너가 무사하단 의미고, 다른 하나는 내가 죽었다는 의미지. 가장 좋은건 반란도 막고 나도 생존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너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같이 인간계로 놀러가자는 약속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널 무사히 살리기 위해선 인간계로 보냈어야했어.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날 용서해주렴.
갓슈. 이 사실은 꼭 기억해주렴. 난 너의 곁에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거란걸. 널 두고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거란걸. 내일 있을 시르헨과의 결전에서도 난 너에게 돌아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할거란다. 결코 널 혼자 남기지 않게하기 위해서말이야.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실패했다는 뜻이지만 그건 꼭 알아주길 바라.
난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난 인간계에서 너에게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가족이라며 날 받아들여주었지. 절대 잊을 수 없어. 잊을 수 있을리가 없어. 난 그 때부터 널 평생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널 지킬 수 있어 난 행복했고 후회하지 않는단다. 또... 너에게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막상 쓰려니 또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널 두고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네가 어릴 때, 형이 생기면 하고싶은 일 100가지를 적어두었지. 아직 20가지도 채 하지 못했잖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회피하기 바빴지. 너무 후회된다. 시간을 쪼개가면서라도 너와의 추억을 더 쌓아둘걸. 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줄걸.
정말, 정말 사랑하는 내 동생 갓슈. 너무나도 사랑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해. 너무 오랫동안 울지 않았으면 해. 너는 모든 이들의 태양이야. 다른 자들과 함께 어우러져 웃는 모습이 더 어울린다. 그러니 지금도 울고 있다면, 울지말고 웃어다오. 나에게 오더라도 꼭 웃는 모습으로 찾아와주길. 언제나, 항상 널 옆에서 지켜줄게.
토에나, 소르티에.
널 언제나 사랑하는 형, 제온 벨.

갓슈는 편지를 다 읽고 품에 안았다. 제온이 분명히 적어두었다. 자신을 혼자 두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것이라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갓슈는 기뻤다. 갓슈가 눈을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달이 뜨지 않아 밖은 어두웠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게. 갓슈가 대답하자 들어온 사람은 티오였다.

“아, 갓슈. 아직 집무실에 있다길래.”

“티오, 아직 퇴궁하지 않은겐가. 무슨 일인가.”

“으응. 이번에 12지구에서 의료지원이 들어왔어. 거기에 대한 예산과 인력을 재정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티오가 말을 하다가 끊었다. 그녀의 눈에 갓슈가 꼭 쥐고 있는 흰 편지지가 보였다. 그 편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티오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춘 것이다. 자신도 받았다. 이틀 전에, 키요마로와 듀포가 인간계로 돌아간 날.
티오가 말을 하다말자 갓슈가 그녀를 향해 티오?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녀의 시선이 어딜 향했는지 확인한 다음, 아 하고 탄식했다.

“이걸 본겐가. 본인이 제일 늦게 받았다고 하더구려.”

“아... 일부러 보려던건 아니었어. 미안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네.”

잠시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갓슈는 편지지를 꼭 쥔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난 괜찮네. 오히려 제온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편해졌네. 그리고 난 2주동안 충분히 슬퍼했으이.”

“…더 슬퍼해도 돼, 갓슈. 넌 그래도 돼.”

“제온이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지 말라고 적어놓았네. 형의 말을 잘 들어야하지 않겠나. 티오한테는 뭐라고 적어놨는지 궁금하구려.”

“나? 으응... 이때까지 방패로서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널 옆에서 잘 보살펴주라고... 네가 정신을 잘 못차리면 등짝을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라고 하던데.”

하하하. 갓슈가 작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조금은 마음이 놓인 티오가 마주웃어주었다. 기운을 조금 차린 것 같아 기뻤다. 역시 갓슈는 웃는 모습이 더 어울린다. 티오가 고개를 됼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달이 안떴네.”

“우누. 보름이 지났으니 뜨려면 두 어시간 정도 기다려야 할 것이네.”

“그렇구나. …아, 그래서 보고서를 곧 너에게 올릴건데...”

티오가 용건이 다시 생각난 듯 말을 이어나갔다. 갓슈도 티오의 말을 들으며 앞으로 있을 12지구 의료파견에 대해 의견을 표했다. 아마 두 사람이 퇴궁하는 시간은 달이 뜰 시간일지도 몰랐다.

티오.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 오다니말이야. 영광인 줄 알아라. 이런 기회 별로 없어. 물론, 네가 이 편지를 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네 앞에서는 아닌 척 했지만 생각해보니 난 너를 꽤나 신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마음을 편지로나마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때까지 방패로서 갓슈를 지켜주어 고맙고, 또 앞으로도 지켜줄 것에 대해 형으로써 예를 표하마. 티오. 넌 강해. 내가 인정하는 방패와 치유능력을 가지고 있는 넌 정말 강한 아이야.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갓슈를 지켜다오. 내 동생을, 꼭 지켜줘.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거야. 갓슈를 맡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 바로 너야. 잘 부탁한다.
마지막 말인데 부탁밖에 없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리고 또 고마워. 너와 같이 있었던 10년, 꽤나 즐거웠어. 넌 부디, 갓슈의 옆에서 임기를 다 채우고 천천히 오길. 나처럼 성급하게 오지 않길.
너의 친구. 제온 벨
추신. 갓슈가 만약 정신을 잘 못차린다면, 등짝을 때려서라도 정신 바짝 차리게 해. 너에게만 주는 특별부탁이야.

***

인간계로 돌아온 키요마로와 듀포는 한동안 같이 지냈다. 타이밍이 어찌나 좋은지, 듀포가 신약을 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추후 있을 프로젝트까지 꽤 긴 시간이 남아있었고 키요마로도 박사논문을 제출하였기에 여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옛날에 곧잘 그랬던 것 처럼 같이 책도 읽고 토론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동안 듀포는 제온의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키요마로도 조심하며 이야기의 주제가 마계쪽으로 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제온의 마지막 편지조차 읽지 않았다. 듀포가 마음을 좀 정리하면 같이 읽으려고 키요마로도 아직 읽지 않은 터였다. 그러던 듀포가 4일이 되는 날, 입을 열었다. 저녁을 다 먹은 후 설거지까지 끝내놓고 거실에서 차를 한 잔 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키요마로. 갓슈가 쓰러지던 날 기억해?”

“응...? 아, 형을 집행한 날인가...”

듀포가 갑자기 꺼낸 이야기에 키요마로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받아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듀포는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안에 담긴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홍차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 날 새벽에 갓슈의 옆에서 졸다가 꿈을 하나 꿨어.”

“…….”

키요마로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듀포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온이 나왔어. 어릴 때 그 꼬마 모습으로.”

코 끝이 찡해졌다. 듀포는 순간적으로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키요마로는 재촉하지 않으며 듀포를 바라보았다.

“제온이 내 손을 잡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더라. 다 가본 곳이었어. 10년 전, 왕위쟁탈전 당시에.”

듀포가 고개를 돌려 거실 앞에 뚫린 큰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참으려는 듯 여러번 눈을 깜빡였다.

“나중에는 자기가 다리가 아프대. 오래 걸었더니 힘들다고. 그래서 안아달라길래 안아주었어. 지금 생각하니 비정상적으로 가벼웠는데도, 꿈 속에선 인지하지 못했지.”

“…….”

“온기가 생생했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말이 끝나고 듀포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잡은 두 손이 살짝 떨렸다.

“제온이 너무 환하게 웃고 있었어. 그 녀석이 그렇게 웃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환하게.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었더니 이러더군.”

듀포가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찻잔으로 시선을 향했다.

“내가 자기의 파트너인게 너무 좋대.”

듀포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찻잔을 잡은 채 팔을 굽혀 손을 얼굴에 묻었다. 소리내어 울지 않기 위해 울음을 삼켰다. 몸이 떨렸다. 키요마로가 다가와 듀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파트너를 직접 정할 수 없는 이 싸움에서, 내가 파트너라 다행이라고 말해주더군.”

“…듀포.”

“…나도, 나도 제온을 만나 파트너가 된게... 너무 기쁘다고...”

그 말을 해주었을 때의 제온은, 잠시 놀란 듯 하다가도 다시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듀포의 목에 팔을 감으며 한 번 더 꼬옥 안아주었다. 고맙다, 듀포. 이 말을 끝으로 듀포는 눈을 뜨며 꿈에서 깨어났다.

“편지를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

“그걸 읽으면 정말 제온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 같아서.”

듀포가 눈물을 닦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그가 키요마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읽어야겠지, 키요마로.”

“너무 억지로 무리하지는 않았으면 해.”

“하지만 언제까지나 회피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옆에서 같이 있어줄게.”

키요마로의 대답에 듀포가 작게 미소지었다. 제온과 마음의 조각이 똑같은 키요마로. 듀포는 그런 키요마로에게 잠시 기대어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작은 아이를, 이젠 마음 속에 묻을 때가 왔다. 제온이 없더라도 그가 살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자신은 살아나갈 것이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있게 말하기 위해서. 키요마로와 듀포가 편지를 읽을 때에는 밝은 달이 하늘에서 아름답게 춤추고 있었다.

듀포.
내 파트너, 내 가족. 듀포, 이 편지를 읽게 해서 미안하다. 네가 이걸 읽지 않기를. 그리고 난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할거다. 갓슈와 너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왕위쟁탈전 당시, 내가 마계로 돌아가기 전 네게 했던 말들 기억해? 살아야한다고 했지. 너같은 사람이 과거에 얽매여서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난 말이야, 네가 계속 언제 죽든지 상관없다는 말을 할 때마다 마음 한 쪽이 되게 아리듯 아팠어. 파우드에서 내 책에 불이 붙었을 때에, 왕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보다 내가 마계로 돌아가면 네가 죽어버릴까봐 난 그게 가장 겁이 났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어. 그래서 널 협박아닌 협박을 하며 널 세상에 묶어놨고 넌 삶의 의미를 되찾았지. 라.피에타에서 그걸 알고는 너무 기뻤다. 말로 형용하지 못할 만큼.
듀포. 그랬던 내가 먼저 떠나버려 미안해. 먼저 성급하게 가버려서 미안해. 난 내일도 네 생각을 할거고, 그럴 일은 만들지 않고 싶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널 생각할거야. 널 두고 간다는 사실에 정말 미안해할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짓을 하는 날 용서해주길. 부디, 일이 다 끝나고 같이 인간계의 밤하늘을 보러 갈 수 있길. 보고싶다. 이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널 딱 한번만이라도 또 보고싶어. 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 아직 하고픈 얘기가 많은데.
듀포, 내 파트너가 되어주어 정말 고마워. 인간계에서 있었던 시간들, 그리고 라.피에타에서 지냈던 시간들 나에겐 정말 소중한 추억들이야. 내가 꼭 간직할테니, 너도 가끔은 꺼내어보며 날 기억해줘. 또 너무 무너지지 마. 너의 강함을 알고 있지만, 너의 연약함도 알고 있으니.
내 또 다른 가족, 너무나도 사랑해.
너의 하나뿐인 파트너, 제온 벨.


키요마로.
이 편지가 너에게 전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내가 떠나게 되면 듀포 옆에서 지켜줄 사람은 너 뿐이다. 듀포를 잘 부탁해. 그리고, 듀포의 친구가 되어주어 정말 고맙고 또 고마워. 듀포가 이렇게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은 네 덕분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듀포는 널 많이 의지해. 생각보다 많이. 개인적으로 너에겐 정말 고맙다는 말을 많이 전하고 싶군. 편지로나마 전해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키요마로,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 파우드 안에서도 느꼈었지만 라.피에타 때의 너는 정말 빛나는 사람이었어. 내가 본 인간들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그렇기에 네가 갓슈의 파트너여서 정말 다행이야. 너가 갓슈의 옆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안심이 돼. 진심이다. 마계로 자주는 못 가더라도 한 번씩 들러줘. 갓슈와 듀포 얘네들은 보기보다 연약해서 네가 힘들겠지만... 주변에 티오나 다른 동료들도 있으니 정신 못 차리면 따끔한 한 마디도 해줘.
한 번쯤은 너와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슬프다. 이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전혀 없으니까. 다음에, 아주 먼 훗날 내가 있는 곳으로 네가 오게 되면 즐거이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으마. 부디 성급하게 오지 말고 천천히 와라.
너의 친구, 제온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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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재작년(2019)에 썼던 글이라 개연성 1도 없음
※카이바 생일에 맞춰서 재작년에 올리려고 했는데 2년이나 지나벟임........
※퇴고따위 하지 않음. 유물 발굴하다가 발견해서 올림
※한마디로 개연성 없구 캐붕 쩔러요 급전개 주의






10월 25일은 카이바 세토의 생일이다. 죠노우치는 1월 25일로 이미 한참 지났다. 사실 사귀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의 생일을 맞았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의 연인에게 과도한(?) 축하선물도 받았다. KC백화점 상품권 5만엔 짜리 두 장. 받자마자 너무 높은 가격에 미쳤냐는 듯이 카이바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고작 이런거 가지고 라는 눈빛으로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에 모쿠바에게 들은 사실이었는데, 그 때 카이바는 죠노우치의 생일선물을 고르기 위해 하루종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 선물 후보는 5만엔 상품권 두 장 정도가 아니었다는 정보도 얻었다. (장난스럽게 ‘차라도 한 대 뽑아주려고 했냐’ 라는 죠노우치의 말에 모쿠바는 그 정도였으면 나도 안말렸다- 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전해듣자 죠노우치는 자신의 선물을 뭐 해줄지 고민하는 그가 상상되어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이제 그의 몫이 되었다. 오늘은 9월 20일이었고 앞으로 생일은 1달 하고도 5일이나 남아있었다. 누가 듣는다면 왜 이렇게 오래 전부터 고민하냐고 물을 수도 있을 만큼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하지만 죠노우치 생각은 달랐다. 사귀고 난 후 처음 맞는 그의 생일이었다. 크고 화려하게는 해주지 못하더라도 기억에 남는 생일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골똘히 생각을 해봐도 마땅히 생각나는게 없었다. 카이바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도, 그 카이바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인물도 아니었거니와 뭘 주던지 식상할 것 같았다. 그 생각에 죠노우치는 아침부터 한숨을 폭폭 쉬어댔다.



“죠노우치 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점심시간 때,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무토 유우기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점심시간이 된지 꽤 지난 시간이었고 다른 친구들은 매점에 가거나 밖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교실에는 둘 뿐이었다. 매점에서 사온 두 개의 빵 봉지 중에 하나를 뜯던 죠노우치가 순간 멈칫하며 유우기를 바라보았다. 유우기는 눈을 두 어번 깜빡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유우기는 사람의 분위기를 읽을줄 알았다.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좋은지 나쁜지. 아니면 걱정거리가 있다던지. 아주 작은 변화도 눈치채는 친구였기에 죠노우치도 이전에 여러번 기분을 간파당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기분 나빴겠지만 친구라 그런지 오히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느낌이라 우정이 두터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친구도 몇 안될 것이다.
죠노우치는, 유우기에게 거짓말은 왠만하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의 그 보라색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자면 거짓말을 할 생각이 쏙 들어갔다. 죠노우치는 대충 얼버무릴 생각이었으나 그의 눈을 보자마자 멋쩍게 웃어버렸다. 누가 봐도 고민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유우기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말해봐, 죠노우치 군. 나도 같이 들어줄게.”
“아, 조금 부끄러운데... 비웃지마, 유우기.”

절대 비웃지 않을게. 주먹까지 쥐어보이며 약속하는 친구를 보며 죠노우치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 부끄럽지만 나름 풋풋한 고민을 말하기 시작했다.




유우기의 첫 번째 반응은 웃음이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하는 친구가 귀여워서 나는 웃음이었다. 연인의 생일에 어떤 것을 해줄지 고민이라니. 심각한 고민이 아닌것에 유우기는 안도했다. 아침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서 또 집안 문제인 줄 알고 마음이 철렁했었는데 카이바 군의 선물이 고민거리였다. 유우기는 죠노우치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보니 분명 죠노우치의 표정은 고민이 많은 모습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설레이는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작게 얼굴을 붉히는 그에게 유우기는 자신도 같이 고민해주겠노라 약속했다. 그 말에 죠노우치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연인이 좋아할만한 선물은 안즈가 잘 알지 않을까?”
“하지만 안즈 걔는 여자잖아. 여자가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랑 남자가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다를걸.”
“으응... 그럴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안즈가 좀 더 세심할 것 같아서.”
“뭐어?? 죠노우치 너 누구한테 선물주게??”

으왁!! 죠노우치는 그대로 놀라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다행히 그 전에 혼다가 의자를 붙잡아주어 땅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매점에서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사와 돌아온 친구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안즈는 아직 놀란 마음을 추스리는 죠노우치를 보며 놀리듯 말을 꺼냈다. 선물의 주인공은 설마~? 키득거리며 웃는 그녀를 한 번 노려본 죠노우치는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저 상태라면 아마 하교할 때까지 놀릴 것이었다. 안즈 특유의 놀림은 어떤 때엔 혼다보다 심했다. 혼다야 한번 세게 놀리고 끝이었지만 안즈는 오랫동안 은근히 꺼내며 놀렸으니까 어쩌면 이 쪽이 더 피곤하다.

“그래. 1달 뒤에 카이바 생일이야.”

체념한 듯 죠노우치가 턱을 괴고 입술을 삐죽였다. 유우기에게만 말하려던 비밀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면 분명히 비웃거나 놀려댈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건만, 이렇게 들킬줄은 몰랐다. 혼다가 죠노우치의 목에 팔을 걸고 장난을 쳤고 오토기도 등을 팡팡 때리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이럴 줄 알았지. 죠노우치는 역으로 혼다에게 헤드락을 걸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즈가 죠노우치의 앞에 의자를 가져오며 앉았다. 아직까지 점심시간은 20여 분이 남아있었다. 죠노우치 또한 둘이서만 고민하는 것 보단 여럿이서 고민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안즈는 죠노우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평소에 잘 하고 다니는 건 무엇인지. 어떤 걸 할 때 가장 기분 좋아보이는지.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지. 기타 등등... 안즈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던 죠노우치는 더더욱 미궁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카이바는 시간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항상 왼손에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다. 듀얼 할 때는 듀얼디스크를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빼놓고 다녔지만 평소 입는 정장에 시계는 필수였다. 그렇다고 자신은 시계를 사줄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카이바가 갖고 있는 시계가 훨씬 좋고 정확한 시계일 것이다. 괜히 싼거 선물했다가 구석에 처박힐 바에야 -평소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그러지는 않을 것 같지만- 처음부터 주지 않는게 나았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었다. 굳이 뽑자면 듀얼이었다. 죠노우치가 카이바에게 초희귀레어카드를 선물해줄 수 있는 실력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카드를 죠노우치가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카드를 구하지 못할 카이바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사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카이바의 생일날 선물을 신경쓰는건 당연했지만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 그 때 카이바랑 300일인데.”

뭐라고??? 주변 친구들이 경악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머 하고 안즈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죠노우치가 더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벌써 300일이구나.”
“으응... 12월 말부터 사귀었으니까.”
“그럼 그 때 카이바 군도 뭔가를 준비하지 않을까?”
“난 계속 받기만 했다고. 이번에는 내가 주고 싶어.”

단호한 그의 대답에 친구들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이때까지 있었던 모든 기념일에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많은 것을 준 것은 사실이다. 죠노우치 생일이야 당연히 카이바 쪽에서 선물을 주고 싶어 하였다. 100일이나 200일 기념일 때도 카이바가 일방적으로 죠노우치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는 부담스럽다며 거절했지만 이 때 아니면 언제 받냐는 말에 말문이 막혀 받았었다. 죠노우치도 기념일에 그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지만 사정상 여건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올해 약 반년 동안은 죠노우치가 꽤나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가 또 빚을 졌다.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지 1주일만에 일어난 일이다. 거의 다 갚아가던 빚은 또 다시 불어났다. 정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빚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이때까지 아버지가 져왔던 빚 보다는 적은 액수라는 것이지, 결코 만만하게 볼 액수는 아니다. 죠노우치는 그 빚을 또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뛰어야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쓰러지다 싶이 잠을 자고 하교 후부터 새벽 5시까지 일을 하다보니, 체력 빼면 시체였던 죠노우치도 점점 지쳐갔다. 오랜만에 카이바가 학교에 등교를 해도 점심시간 이후 짧게 만나며 이야기를 나눌 뿐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방과 후에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서둘러 하교해버리니 만날 시간은 더더욱 줄었다. 보다못한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그 빚을 자기가 다 갚겠다고 했지만 죠노우치가 크게 화를 내며 절대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것 때문에 이틀 정도를 거하게 싸웠다.

‘쓸데 없는 고집은 그만 부려라, 범골!’
‘너야말로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 반갑지 않으니까!’
‘내가 하는 참견이 쓸데없나? 이건 연인이라면 당연히 걱정되는 문제다.’
‘걱정해주는건 고맙지만 이건 내 사정이야.’

카이바는 거절하는 죠노우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죠노우치는 자신의 가정사에 참견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싸웠지만 결국 카이바가 두 손을 들며 항복했다. 카이바 만큼, 죠노우치도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죠노우치는 집에 고이 모셔져있는 정장과 (KC 연회 파티때 입으라며 사주었다.) 고급 시계, 고급 향수를 떠올렸다. 시계는 차면 닳을까 싶어 케이스에 보관하며 매일 먼지를 닦아주고 있었고 향수는 쓰면 없어질까 아까워 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장은 아직 입을 일이 없으니 패스하자. 카이바가 그 선물들을 줄 때 죠노우치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네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연인이 되게 하지 마라.’ 라며 못을 박았다. 물론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죠노우치는 힘든 시기에 향수와 시계를 보며 힘을 낼 수 있었다.

“너는 어떤 선물을 주고 싶은데?”

혼다가 물었다.

“…글쎄. 보면 나를 떠올릴 수 있는 선물?”
“죠노우치 주제에 어려운 생각하지 말라고...”
“정성을 다해 만든 쿠키... 그런건 안되겠네. 먹으면 없어지니까.”

어느 새 오토기와 바쿠라도 합세하여 머리를 말이었다. 안즈가 바쿠라에게 넌 항상 먹을거냐- 라고 작게 웃었지만 죠노우치는 지금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죠노우치가 선물을 보며 카이바랑 떠올리듯이 선물을 받은 카이바가 그 물건을 보며 자신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선물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죠노우치는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카이바 성격 상 절대 못할 것 같았던 편지도 -비록 2줄 적혀있었지만- 한 통 있는 것을 생각해낸 죠노우치는 짧게나마 카드편지를 써주어야겠다 생각했다.
어느 덧 시간이 지나 아무런 묘안도 떠올리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같이 고민해주겠다고 친구들은 말해주었다. 그것 만으로도 죠노우치는 충분히 고마웠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책을 펴 턱을 괴었다. 이제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은지 오래다. 여름방학 때 정말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한 결과 그 빚도 거의 갚았기 때문이었다. 죠노우치는 그만큼 빚을 상환한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집을 당장이라도 뛰쳐나갔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조금이라도 변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계속 기대를 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밖에 나가있던 다른 반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종이 울릴테니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죠노우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빈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창가쪽에 자리하고 있는 빈 자리는 그의 연인의 자리였다. 학교에 안나온지 오래다. 방학하기 하루 전에 잠시 나오고 그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방학 때는 카이바도 바빴지만 죠노우치의 아르바이트 때문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자기 전 잠시 통화하는게 다였다. 보고싶다. 죠노우치는 책상에 엎드려 주인을 기다리는 빈 자리를 쳐다보았다.

“이거 봐, 어때?”
“와! 뭐야 뭐야? 남자친구한테서 받은거야?”
“응. 200일 기념으로 선물 받았어.”

200일 선물? 죠노우치는 200일 선물이라는 단어에 귀가 번쩍 하고 띄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는 여학우 두 명이었다. 죠노우치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행동하며 이야기를 엿들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던 죠노우치의 표정이 조금은 환해졌다.






“나 먼저 간다.”
“어? 죠노우치 군, 오늘 같이 게임샵 가지 않을래?”
“아, 미안 유우기. 오늘부터 아르바이트 다시 하기로 했어.”

1주일 후, 하교하려는 죠노우치에게 유우기가 오랜만에 게임샵에 들르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죠노우치는 가방을 급히 싸며 거절했다. 아르바이트. 유우기는 그 말을 듣자 걱정부터 앞서기 시작했다. 절친한 친구로써, 지난 반년 간 죠노우치가 어째서 그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가 허용되지 않는 도미노 고교에서도 유일하게 허용되는 사람이 바로 죠노우치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걱정스러운 유우기의 표정을 본 것인지 죠노우치가 그의 어깨를 탕탕 치며 웃었다.

“걱정마. 빚 때문에 그러는거 아니니까. 이건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하는거야.”

빚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죠노우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유우기는 안심할 수 있었다. 죠노우치는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두 사람 사이에는 있었다. 유우기는 짐작가는 일이 하나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드디어 선물을 고른거구나 라고 생각하며, 죠노우치에게 미소지었다. 무슨 선물을 골랐는지 궁금했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 말해줄 터였다. 유우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급히 하교하는 죠노우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이바 군은 좋겠네.
노을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10월 25일은 토요일이었다. 정말정말 좋은 일이었다. 만약 카이바의 생일이 토요일도, 일요일도 아닌 평일이었다면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친 후에야 만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저녁먹고 바로 헤어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0월 25일이 토요일이라니. 죠노우치는 이건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신은 믿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죠노우치가 오늘의 날짜에 빨간 색으로 X표시를 그었다. 내일만 지나면 그의 생일이었다. 얼굴을 볼 수 있었다. KC는 현재 새로운 버츄얼 시스템을 개발중에 있었기에 카이바는 너무나도 바쁜 상황이었다. 매일마다 하던 전화도 점점 짧아졌다. 죠노우치는 그에 화가 나는 대신 조금 걱정되었다. 카이바는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피로와 갈라짐은 숨길 수 없었다. 어제는 통화를 거니 카이바 대신 모쿠바가 받았었다. 시스템을 거의 최종적으로 마친 후 사장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잠들었다고, 모쿠바가 전해주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쿠바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도 쌩쌩한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아 서둘러 전화를 끊게 하였다. 오늘은 통화 되려나?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찰나, 평소에는 거의 커다란 시계로 활용하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그토록 보고싶은 연인이었다. 죠노우치는 서둘러 통화연결 화면을 터치했다.

“카이바??”
[범골, 아직 안자고 있었나?]

전화를 받을 줄 몰랐다는 듯 말하는 그의 말에, 죠노우치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 반.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으응, 아직 잠이 안와서. 네 전화 기다리기도 했고.”
[그랬군. 어제는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아, 아니!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모쿠바가 잘 말해주기도 했고…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말한 죠노우치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니. 이런 낯간지러운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그는 보이지도 않을텐데 입을 손으로 막았다. 통화 상이라서 자신의 빨개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동안 침묵이 유지되다가 곧이어 하하 하고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죠노우치가 가장 좋아하는 카이바의 웃음소리다. 그리고 ‘나도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죠노우치는 심장이 간질간질 해지는 기분이 들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 문질렀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카이바와 죠노우치는 30분 가량 통화를 하였다. 새벽이었기에, 죠노우치는 아침에 학교를 가야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통화할 수 없었다. 카이바는 이제 곧 출시될 새로운 버츄얼 시스템 게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듀얼과는 다른, KC 자체적으로 발명한 게임이었다. 지금은 다른 게임에 적용시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듀얼에도 적용시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 때가 되면 일도 줄어들테니, 같이 듀얼이나 하자고 말해오는 그에게 죠노우치는 꼭 그러자며 약속을 받아냈다. 죠노우치는 그냥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을 말해주었다. 유우기나 다른 친구들과 놀러간 일 등을 말하다가 저번에 듀얼을 했을 때 유우기에게 비겼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카이바는 범골 듀얼리스트에서 듀얼리스트로 승격시켜주겠다고 응대해 죠노우치의 화를 돋구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전화를 끊어야할 즈음 죠노우치는 더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카이바의 목소리가 점점 잠기는 것을 알아차려 더 이상은 어리광 부릴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끊어야할 것 같아 말을 정리하려고 죠노우치가 카이바에게 물었다.

“저, 카이바.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날 수 있어?”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토요일에 일정이 잡혀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애초에 서로 이 날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 카이바는 무척이나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감안해야했다. 짧은 텀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그는 괜스레 긴장되었다.

이번 주 토요일. 카이바는 죠노우치에게서 들은 요일을 듣자마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불현듯 떠오른 사실에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원래 전화를 걸어 말하고 싶었던 본래의 용건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통화하며 목소리를 듣다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늦은 시간 죠노우치가 전화를 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아 놀라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받던 전화를 왼손으로 고쳐잡은 후 메모지를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카이바?]
“그래. 이번 주 토요일, 당연히 만나야지.”
[정말? 시간 괜찮은거야?]

그래. 짧은 긍정의 말에 죠노우치는 정말 기뻐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하이톤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는게 안봐도 비디오였다. 수화기 너머로 텐션이 업 된 죠노우치의 목소리를 듣자니 카이바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 주 토요일이 무슨 날인지는 카이바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일이자, 죠노우치와 연인이 된지 300일 되는 날이었다. 핸드폰에 죠노우치가 깔아둔 어플 중 하나인 날짜를 세주는 어플이, 잠금화면을 해제하면 바로 나타났기 때문에 사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카이바는 잠시 휴대폰을 얼굴에서 떼어 화면을 확인했다. +299♥️ 라고 적혀있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숫자 뒤에 붙어있는 하트는 죠노우치가 붙인 것이었다. 원래 성격의 카이바였다면 당장에 하트를 지우라고 닦달했을 테지만 저 하트를 붙일 때의 죠노우치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보여 차마 지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 핸드폰 화면을 보던 모쿠바가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의 표정을 그도 보았어야 했다.
사실 토요일에는 이 것 말고도 하나 더 해야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전화를 건 것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내일 말해야할 것 같았다.

“자세한 약속은 내일 잡지. 지금부터라도 자지 않으면 아침에 등교에 영향이 있을거다.”
[응? 응응! 알았어! 너도 푹 쉬고, 우리 나중에 또 통화하자!]

죠노우치는 토요일 카이바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지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밝게 웃었다. 카이바는 지금 그의 표정은 보지 못하지만 어느정도는 상상가는 듯 작게 미소지었다. 잘 자라는 마지막 인사를 한 다음에, 비로소 통화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카이바는 통화를 종료한 다음 의자에 기대어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지만 마지막 마무리가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는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원래는 모쿠바에게만 허용되는 미소였지만 이제는 허용범위가 한 사람 더 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였다. 연애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딱 그 말이 자신에게 맞는 말이었다.
카이바는 메모지에 적어둔 일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하였다. 죠노우치는 이제 아버지의 빚을 거의 다 갚은 상태라고 했다. 그럼 그의 성격 상 이번 300일 기념일이자 생일인 10월 25일에 아무것도 안할 리가 없었다.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카이바는 자신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하는 연인이 정말 귀여웠다. 그렇기에 이번 만큼은 받아주기만 할까 했지만 또 그러기에는 카이바 성격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 자두었다가, 날이 밝으면 이소노에게 스케줄을 좀 조절해달라고 할 생각을 하며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몸은 정말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말똥 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잡은 약속이라 그런지 설레여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죠노우치도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죠노우치는 나가기 전 옷매무새를 체크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데이트를 했었지만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첫 데이트 마냥 떨리기만 하였다. 그는 평소에는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는, 선물받은 향수를 뿌렸다. 카이바가 선물해준 것이니, 그도 향을 알고있을 것이다.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향은 너무 독하지도, 그렇다고 연하지도 않은 시원한 향이었다. 오히려 카이바에게 더 잘 어울릴 법한 향이었는데 한번 뿌리고 등교한 날 안즈가 자신과 정말 잘 어울린다며 칭찬해주었다. 죠노우치는 시계를 찰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왼쪽 손목에 끼운 후 똑 소리를 내며 시계 클러치를 닫았다. 한 번도 시계를 차본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의 왼쪽 손목은 꽤나 어색했다.
가방을 챙기고 죠노우치가 정말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산 선물까지 가방 안에 넣었다. 어제 정성을 다해(?) 적은 편지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제 안즈네 집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만든 케이크도 확인했다. 빠진건 없는지 두 세번 더 체크한 다음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KC 본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다른 곳에서 만났겠지만 오늘은 KC 본사에서 만난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어제 카이바에 의하면 오늘까지 올라와야 할 서류가 올라오지 않아, 부득이하게 내일 아침에 처리해야한다 라고 했다. 죠노우치는 사실 상관 없었는데 그 쪽은 그게 어지간히 신경쓰인 모양이었다. 죠노우치는 그 때 카이바에게서 두 번째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까지 올라온 죠노우치는 저 멀리 문이 보이는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에서 익숙한 비서가 나와 맞이하자, 비서의 어깨 너머에서 안경을 낀 채 서류를 처리중인 카이바 세토가 보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체면이 체면인지라 아무 말 하지 않고 사장실에 들어가 가만히 서있었다. 서류를 작성하던 그가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눈동자를 굴려 정면을 쳐다보다가, 이내 눈이 마주치자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그 미소에 죠노우치는 멍하니 서있다가 이내 마주 웃어주고는 손을 작게 흔들었다. 아, 잘생겼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빛이 났다.
완성시킨 서류를 프린트하고 서명까지 하자 모든 일이 끝난 듯 보였다. 서류철을 가지고 비서가 나가자 큰 사장실에 드디어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은 눈치가 보여 쭈뼛쭈뼛 서있는 그에게 카이바가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제서야 죠노우치는 케이크상자를 놔두고 카이바에게 달려갈 수 있었다.

“카이바-!!”
“흠. 어지간히 보고 싶었나 보군.”

카이바에게 폭 안긴 죠노우치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를 단단히 안은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보고싶었던건, 카이바도 마찬가지였다.

“생일 축하해, 카이바! 진짜 진짜 보고싶었어.”
“……흥.”

조금은 직설적인 마음고백에 카이바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원래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떤 감정인지는 숨기기 어려웠다. 카이바는 부끄러울 때 귀가 빨개지는 타입이었다. 그걸 잘 알고있는 죠노우치는 빨개지는 귀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걸 보면 정말 귀엽다. 떨어지기 싫었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품은 정말 따뜻했다. 이윽고 카이바가 안고있던 팔을 풀었다. 그는 죠노우치의 목 주변에 코를 가져다대고 숨을 짧게 두어번 들이켰다. 저번에 자신이 선물해준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코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다고 신경을 좀 쓴 모양이었다. 자신이 골랐지만 향수는 죠노우치와 정말 잘 어울렸다. 향수를 고를 때 거의 한 시간을 고민했다는 사실은, 모쿠바만 알고 있는 일이자 죠노우치에게 말하지 않은 유일한 비밀이다.

“아, 그리고 이거! 내가 직접 만든거야.”
“음?”

죠노우치는 잠시 내려놓았던 케이크상자를 들어 카이바에게 건네주었다. 카이바는 케이크상자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케이크를 꺼내보았다. 이내 카이바의 눈이 드물게 동그래졌다. 케이크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였다. 카이바가 놀란건 생크림케이크 때문이 아니다. 케이크에 장식되어있는, 설탕으로 만든 푸른눈의 백룡 모형때문이었다.
원래, 카이바의 생일에 죠노우치가 직접 케이크를 만들 생각이었다. 죠노우치는 의외로 요리를 잘했다. 어릴 때부터 거의 살림을 혼자 하다싶이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제과제빵과 요리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우선 레시피를 보며 만드는 것에는 결코 실패한 역사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불행한 점이 있다면 죠노우치의 집에는 오븐이 없다는 점이었다. 시즈카 생일때도 오븐이 없어 안즈네 집에서 만들었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안즈에게 부탁을 해야했다. 다음에 안즈에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죠노우치가 요리를 잘 한다는 것은 카이바도 알고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가 만들었다고 가져온 간단한 도시락을 먹어보면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탕공예라니. 물론 세세하게 만들지는 못해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수준급이었다.

“네 녀석이 이런데에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응? 아, 제과점에서 알바 했을 때 사장님이 조금씩 가르쳐주신 적이 있어서.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푸른 눈이랑 비슷하게 생겼지?? 마음에 들어?”
“아아. 그래. 정말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죠노우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씨익 웃었다. 겉은 생크림이지만 빵은 초콜릿 빵이라며 정말 맛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카이바는 평소에는 거의 짓지 않는 미소를 보이며 다시 한번 더 죠노우치의 이마에 짧게 입맞췄다.


-


카이바는 항상 입던 정장이 아닌, 일반 와이셔츠와 슬랙스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오전부터 밖에 나가는걸 생각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입고 나온 것이었다. 원래라면 서류 처리가 끝나자마자 밖에 나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자신의 연인과 같이 있을 심산이었다. 원래라면 모쿠바와 계속 함께 있었겠지만 올해에는 다른 사람이 옆에 있고, 그걸 이해해주지 못할 동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쿠바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갖고 싶은건 없냐고, 뭐든 다 구해다 주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모쿠바가 구할 수 있는걸 카이바가 구하지 못할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형의 생일을 챙겨주려는 동생이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형!! 갖고 싶은건 생각했어?”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모쿠바를 생각하자마자 사장실 문이 열리며 동생이 들어왔다. 저보다 5살 어린 남동생 이었고 아직 제 눈에는 어리기만 한 꼬마였지만 그래도 어엿한 부사장 이었다. 성장기라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크는 동생을 보는 낙으로 살아가는 카이바였다.
모쿠바는 카이바에게 다가가려다, 이미 사장실에 들어와 있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달려갔다. 죠노우치-! 하고 허리를 감싸안으며 폭 안긴 모쿠바는 14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귀여웠다. 키가 자라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죠노우치보다 한참 작아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모쿠바가 아무런 허물 없이 대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그 중 한 명이 죠노우치였다. 형의 연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둘은 꽤 친했다.

“오! 오랜만이다, 모쿠바! 잘 지냈냐?”
“당연하지!! 죠노우치도 잘 지낸 것 같은데?”
“나도 무척이나 잘 지냈지! 마침 잘 됐다. 케이크 먹으려고 너도 부를 생각이었는데.”

케이크? 모쿠바가 고개를 들어 죠노우치를 쳐다보다가 이내 책상 위에 놓인 케이크를 발견했다.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때 지은 표정이, 카이바와 너무 닮아 죠노우치는 작게 웃고 말았다. 성격이나 생김새는 언뜻 보면 정말 닮은 구석 하나 없는 형제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형제가 맞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먹기 아까웠지만 케이크는 사람이 먹으라고 만든 음식이기에 죠노우치는 아낌없이 잘라 나눠 먹었다. 카이바의 비서인 이소노에게도 나눠주었다. 케이크는 원래 냉장고에 놔뒀다가 나중이 먹을 생각이었지만 모쿠바도 마침 오고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 먹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케이크를 먹는 중간중간 계속 사장실로 무언가가 배달되어 왔지만 비서들이 정리만 할 뿐 카이바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죠노우치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필요한 물품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죠노우치, 오늘 연회 올거지?”
“연회? 아, 당연하지. 어제 카이바 한테서 들었어.”

모쿠바가 죠노우치에게 물었다. 연회. 카이바가 이틀 전 죠노우치에게 전하려고 했던 용건이 바로 이 것이었다. KC는 새로운 시스템이나 듀얼시스템이 나오면 행사를 치르는 김에 연회를 열었다. 크든 작든 무조건 열었다. KC 만의 관례같은거라고 생각했었다. 죠노우치도 카이바의 초대를 받아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작은 규모가 아닐 터였다. 새로 개발한 버츄얼 시스템은 일루전 사와 계약을 맺어 듀얼에도 적용할 계획이 있었고, 이 시스템은 KC의 독자기술이기 때문에 다른 기업에서 이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이용료를 내야했다. 그렇기에 이번 새로운 시스템은 결코 작은 아이템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번 연회 규모도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게다가 카이바의 생일까지 겹쳐 그를 축하하기 위한 행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카이바는 화려한 남자였지만, 정작 화려한 일은 싫어했다. 돈을 아끼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필요없는 물품을 과시용으로 사지는 않았다. 예시로, 지금 죠노우치가 있는 사장실만 하더라도 딱 필요한 가구가 끝이었다. 예전에 고자부로가 정말 쓸모없고 비싸기만 한 도자기나 그림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사 모았던 것과는 매우 극과 극인 셈이다. -그 과시용 물품들은 카이바가 사장이 되면서부터 싸그리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카이바는 연회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연회를 할 시간에 새로운 듀얼디스크를 개발하는것이 더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회 또한 뺄 수 없었고 연회에 죠노우치를 초대한 것이었다.

“저녁 전까지는 들어오마. 그때까지 부탁한다 모쿠바.”
“당연하지, 나한테 맡겨둬! 나가서 오랜만에 재밌게 놀고와. 형, 이번 기획때문에 쉬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모쿠바의 얼굴에서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정말 서로 죽고 못사는 형제다. 가끔은 둘 사이가 질투날 정도로 부럽기도 했었다. 갑자기 시즈카가 보고싶네. 죠노우치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몇달 만에 단 둘이서, 그것도 카이바의 생일날 하는 데이트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죠노우치는 오늘을 위해 알바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칼로 잰 듯한 코스로 카이바를 데리고 다녔다. 카이바는 아마 모를테지만 죠노우치는 어제까지 안즈나 유우기한테 괜찮은 데이트 코스를 계속해서 물어보고 다녔다. 그 결과로 엄선하고 엄선하여 뽑아낸 곳으로 돌아다니는 중인 것이다. 보통 연인들에게는 정말 기본적인 데이트일지도 몰랐지만 둘은 그런 데이트를 할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날은 정말 특별했다. 이제껏 데이트라고 해봤자, KC 앞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카이바 저택으로 가 저녁을 함께 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죠노우치가 걱정했던 점은, 카이바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람이었고 메스컴에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될까봐, 그래서 카이바가 좋아하지 않을까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기우라는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둘은 사람들이 많은 시내에서 아주 잘 돌아다녔다. 카이바는 안경 하나 쓰고 있었는데 -요즘 눈이 나빠져 끼고 다닌다고 했다- 사람들은 카이바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카이바는 처음 나온 시내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옆에서 익숙하게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죠노우치를 보고 있자니 이런 데이트도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시내 가운데에 있는 공터애서 꽃축제가 열려 그 곳에서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였고 유우기가 추천해준 게임랜드에 들어가 둘이서 열심히 게임을 하며 열을 올리기도 했다. 오히려 죠노우치가 카이바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가 생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카이바는 오랜만에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망했다.
죠노우치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연회가 시작될 시간이 다 되어서 모쿠바가 차를 보내 타고가는 중이었다. 죠노우치는 카이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표정을 알리 없는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기분좋은 촉감을 즐겼다.
물론 오늘 데이트는 만족스러웠다. 죠노우치가 카이바와 하고 싶었던 일은 거의 다 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바가 즐거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보여준 미소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죠노우치도 그정도 쯤은 구별할 줄 알았다. 문제는 데이트가 아니었다.
죠노우치는 자신의 가방 안에서 아직도 건네주지 못한 선물상자를 확인했다. 분명 점심을 같이 먹는 도중에 타이밍을 잡아 전해주려 했는데, 한번 실패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좋은 순간을 다 놓쳐버린 것이었다. 또 꽃축제에서 전해주려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뭔가 공개청혼(?) 같아서 포기했고, 한적한 가로수길을 걸으며 적절한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전해주려 했는데, 하필 그 때 카이바에게 전화가 걸려와 실패했다. 이 다음에는 연회였다. 연회는 아무래도 카이바가 중심이 되다보니 매우 바쁠 것이다. 연인과 함께 하는 자리라고 해도 유명인사가 많이 올텐데 카이바가 죠노우치하고만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카이바가 죠노우치에게 ‘유우기와 바쿠라도 초대했다’ 라고 귀띔해준 것을 보아 카이바 또한 죠노우치가 혼자 남을수도 있을 상황을 대비한 것 같았다. 유우기는 이해되지만 왜 바쿠라도 초대했냐는 질문에 바쿠라는 배틀시티 8위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배틀시티 8인은 다 초대한 것 같았다. 연회는 카이바 저택이었다.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준비중이었다. 아직 시작되려면 1시간은 있어야했기에 죠노우치도 얼른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다. 넓고 넓은 카이바 저택 마당이 거의 꽉 찰 정도로 많이 왔다. 흰 테이블이 세팅되고 그 위에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찼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카이바는, 즐겨입는 하얀 정장에 푸른 넥타이를 메고 있었다. 평소 때 입는 일반 정장도 좋았지만 죠노우치는 저 하얀 정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카이바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정장에 빼꼼 튀어나온 행거칩도 청명한 하늘색이었다. 멍하니 카이바를 바라보고만 있자, 카이바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죠노우치 앞에서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정신 차려라, 범골. 죠노우치의 콧잔등을 가볍게 톡톡 쳤다.

“넌 하얀색이 정말 잘 어울려.”
“…그런가.”

응응. 죠노우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모습에 카이바는 작게 웃더니 자켓 안에서 빨간 손수건을 꺼냈다. 왠 손수건이지 싶었지만 이내 카이바는 능숙하게 접더니 죠노우치의 앞주머니에 살며시 넣었다. 행거칩이었다. 정장에는 이게 빠질 수 없지. 카이바는 행거칩을 톡톡 치며 눈을 살짝 접어 웃었다. 모쿠바에게만 보여주던 다정한 미소였지만 이제는 죠노우치도 그런 미소를 가끔 보고는 했다. 그 미소에 죠노우치는 얼굴이 확 붉어짐을 느꼈다. 언제봐도 카이바가 웃는건 적응되지 않는다. 항상 차가운 표정만 보아와서인가, 미소를 지어줄 때면 예외없이 심장이 쿵쿵 뛴다. 카이바는 그런 죠노우치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연회는 사실 재미없다. 고위층 사람들의 친목도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카이바가 마이크를 잡고 생일을 축하해줘서 고맙다는 아주 간단한 인사를 전하고, KC가 개발한 버츄얼 시스템에 대해 연회를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죠노우치의 예상대로 카이바는 다른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바빴다. 그의 옆에는 모쿠바가 와 있었다. 뒤에는 이소노를 비롯한 세 명의 비서도 서있었다. 몇 달을 고생해서 만들어낸 쾌거였지만 그 이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오늘 연회가 끝나면 제대로 쉬려나. 멀리서 사람들을 만나는 카이바를 보며 죠노우치는 생각했다.
바쿠라와 유우기도 와있어서 사실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힐끔 눈을 돌려 카이바를 바라보았을 때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카이바는 손을 살짝 들어 반응해주었다. 그 행동에 죠노우치 또한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카이바 뒤에서 모쿠바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던건 덤이다.

“헤에… 카이바 군, 바쁘구나.”
“아아. 그렇지, 아무래도. 잘나신 사장님이시니까.”
“오늘 데이트는 어땠어, 죠노우치 군?”
“너랑 안즈 덕분에 진짜 재밌게 놀고 왔다! 고마워, 유우기. 나중에 맛있는거 사줄게.”

유우기는 다행이라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그렸다. 사실 모처럼 데이트 하는 날인데 연회가 잡혀버려 기분이 안좋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다. 하지만 카이바의 성격 상 그 또한 이 연회가 달갑지는 않을 터였고, 그걸 죠노우치도 알고 이해해주었을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고 배려하는 모습이 보여 유우기는 괜스레 기분이 뿌듯했다. 사실 사귄다고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정말 놀랐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예쁘게 사귀고 있어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이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때, 카이바는 죠노우치를 찾는다고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저에게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대꾸만 해주며 연인을 찾는 그의 눈에 저 멀리 유우기와 바쿠라와 함께 있는 죠노우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죠노우치. 그를 부르자, 거리가 꽤 되는데다가 카이바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죠노우치는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이내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드는 그가 보였다. 카이바도 웃으며 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곧 유우기와 뭐라 말을 하다가 이내 자신한테로 다가왔다.
죠노우치가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자리를 피했다. 그제서야 카이바는 표정을 풀고 그의 손을 잡아 어디론가 이끌었다. 죠노우치는 아직 입 안에 남아있는 과일을 우물우물 씹으며 그가 데려가는데로 그대로 끌려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발견한 모쿠바는 곧이어 옆에 서있던 이소노에게 사인을 보냈다.

“카이바, 어디가?”
“네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있다.”
“그게 뭔데?”
“가보면 알아.”

카이바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 능숙하게 맨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저택은 생각보다 매우 높았다. 메이드들이 한 명도 없는 저택 안은 생각보다 썰렁했다. 3층까지 올라가자 그제서야 카이바는 긴 복도를 지나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꽤 깔끔하고 정돈된 방이 나왔다. 컬러가 화이트 앤 블루인 것을 보아 카이바의 방인 것 같았다.

“여기서 가장 잘 보이겠지.”
“…뭐가? 말해주면 안되냐?”

아직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죠노우치가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카이바는 그에 ‘알게 될거다.’ 라는 말만 하고는 방을 가로질러 테라스로 나갔다. 3층 꼭대기에 있는 카이바의 방, 그에 딸려있는 테라드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꽤 높았다. 하지만 앞에는 깜깜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하는 순간이었다.





빨간 폭죽이 위로 솟아오르더니 예쁜 원을 그리며 터졌다. 그 폭죽을 필두로 하여 형형색색의 폭죽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밝은 폭죽은 깜깜했던 눈 앞을 비춰주었고 태양처럼 크고 아름다운 빛은 잠시 넋을 놓고 감상하기에 충분했다. 여름 축제를 제외하고는 볼 일이 거의 없었던 불꽃축제인 셈이었다. 죠노우치는 불꽃축제를 간 적이 거의 없었다. 축제를 즐길 시간도 없었거니와 관심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불꽃은, 너무나도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몇 분 정도를 감상하고 있다가, 이내 옆에서 카이바가 손을 꼭 맞잡았다. 놀란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카이바는 불꽃을 보는게 아니라 죠노우치를 보고 있었다. 카이바가 싱긋 미소지었다.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법한 그의 미소였다. 얘 오늘 생일이라고 자주 웃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테라스 밖이라 어두워서 안보일 법도 했지만 계속 터지는 폭죽 때문인지, 아니면 방 불빛 때문인지 아주 명확하게 표정이 잘 보였다.

“어떻냐, 범골.”
“나 불꽃축제 보는거 오늘이 두 번째야.”
“……그렇나.”
“진짜 예쁘다. 너랑 함께 봐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전했다. 말을 하면서도 간질간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을지 이제는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카이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더 이야기 해도 된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죠노우치는, 아까 연회 전에 자켓에 넣어둔 선물상자를 떠올리며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생일 축하해, 세토.”

불꽃보다 환하게 웃으며 죠노우치는 아예 몸을 돌려 카이바와 마주섰다. 지금이야말로 선물을 전해줄 타이밍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죠노우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타이밍 때문에 이때까지 실패를 한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품 속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 카이바의 왼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끼웠다.
그게 무엇인지 깨닫자, 카이바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건 반지였다. 단순한 디자인에 실버였지만, 정말 영락없는 커플링이었다.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반지는 카이바의 손에 꼭 맞았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반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죠노우치가 우물쭈물하며 카이바의 손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건 아닌가 걱정도 들었다.

“아.. 그게 백금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비싸서... 실버도 이쁘지 않아? 금보다는 은이 더 예쁜 것 같고... 너한테도 잘 어울리고...”
“범골.”
“으...으응??”

카이바는 오른손을 뻗어 죠노우치의 손에 들려있던 상자를 들었다. 그리고는 안에 들어있던 다른 반지를 집어 죠노우치의 왼손에 끼워주었다. 마치 프로포즈 하는 것 같잖아. 죠노우치는 심장이 더 쿵쾅댔다.

“백금이든 은이든 상관없어.”

지금 무척이나 기쁘군.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손에 끼워진 반지 위에 짧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죠노우치는 조금은 붉게 물든 듯한 카이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붉은 불꽃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또한 얼굴이 붉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혼반지는, 백금으로 맞춰주지.”

평소같았으면 엄청 부끄러워하며 무슨 소리냐고 난리 쳤을 법도 한데, 죠노우치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모든 말이 지금은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렸을 것이었다.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카이바를 바라보자 죠노우치도 그에 따라 배시시 웃고 말았다.
카이바가 죠노우치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또한 카이바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안았다. 옆에는 아직도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있어 두 사람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두 번, 카이바는 죠노우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콧잔등을 따라 내려오며 계속해서 쪼아대듯 키스를 남겼다. 입술만을 남겨두고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이내 부드럽게 입술이 닿았다.

달콤한 시간은 불꽃놀이가 끝난 다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End.













Epilogue.

죠노우치는 어느 때와 같이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 누워있었다. 날이 조금은 쌀쌀해진 것 같았지만 햇빛은 아직도 따뜻했다. 그런 그의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여기 올 일이 절대 없을 것 같았던, 고귀하고 잘난 자신의 연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나 봤더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군.”
“옥상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냐.”

카이바가 자연스럽게 죠노우치의 왼편에 앉았다. 죠노우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카이바의 허벅다리에 얼굴을 베고 누웠다. 거부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카이바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금발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카이바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감촉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죠노우치가 왼손을 들어 카이바의 입술을 매만졌다. 카이바는 죠노우치의 손을 잡고 약지에 끼워져있는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카츠야. 카이바 특유의 낮은 저음이 죠노우치의 이름을 부르자 또 예외 없이 그의 심장이 쿵쾅댔다.

응. 그도 작게 대답한다.









Epilogue+

“모쿠바.”
“응, 형님.”
“죠노우치가 졸업 하자마자 결혼하는거 어떻게 생각하니.”
“……지금 그 질문 정확하게 35번째야.”
“범골은 화려한걸 싫어하니 결혼식은 정말 가까운 사람만 초대 해야겠군.”
“…….”
“아, 걱정하지 마렴. 반지는 백금으로 이미 봐두었단다.”
“그게 문제가 아닐텐데, 형님...”


애꿎은 모쿠바의 고생만 더 늘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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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엘의 오늘의 구절.
아, 껴안고 싶은 밤이다. 아니다, 버리고 싶은 밤이다.
#오늘의_구절
https://t.co/1YtJqHoIXN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네 홍차에 독을 탔어."

엘는 말했습니다.
"잘 마실게."
꽃병에 부어버렸습니다.

거센 빗소리가 들려옵니다.
https://t.co/06Qd0zefRj





[월엘]님을 위하여, 오늘의 문장

우리 둘은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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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엘, 오늘의 문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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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너는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르지. 너를 영원히 갖기 위한 부정일까.

#당신께_드리는_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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