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나는 손이 좋았다. 뒤쳐질 때 앞서가던 사람들이 내어주는 것도 손이었고, 뒤쳐지는 자에게 내밀어줄 수 있는 것도 손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이 내밀어준 것도 따뜻한 손. 그와 함께 살아갈 이유를 찾아주겠다고 한 그때의 상황을 난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친구들이 나에게 준 관심은 이제 난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남은건, 차디찬 그들의 시선 뿐.
"판테온..?"
약간의 당혹감이 서린 목소리에 앞에 있는 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빨간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꼭 약간의 무시를 담은 것 같았다. 뭐 항상 그의 시선은 좋지는 않았지만.
"왜 거길 가는거지?"
"한번쯤은, 이런 외출도 좋잖아?"
그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보인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기좋은 미소는 아니다. 외출이라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여유를 느끼는 게 조금 어색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이끌리게 되는 그의 웃음에 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만족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봉인되었다가 깨어난 직후여서 수백년이 흘렀다는 감각도 없어 마치 추억들이 어제일 처럼 너무나도 생생한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웠다.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 친구들에게서 들려오는 말들은 모두 나의 정체를 묻는 질문과 경계하는 말 이 두가지 뿐. 게다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존재마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훨씬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나를 유일하게 기억하는건, 나를 이렇게 만든 검은 마법사였다. 그걸 안 나는 스스로 저주스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였다. 내가 죽어도 검은 마법사는 죽지 않는다는 것에 깊은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그가 소멸되면 나도 같이 소멸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살짝 겁이 나기도 해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난 느꼈다. 마음속 깊이, 아주 깊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에 무척이나도 기뻐하고 있었다. 그 기억해주는 대상이 비록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라 해도 기쁨과 동시에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이끌려버린 것이.
"이런 상황에서 나가도 되겠어?"
결국 마음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한동안 내 머리를 만지작 거리던 검은 마법사가 눈동자만을 굴려 나를 쳐다보았다. 보는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로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을 맞받아주며 대답을 재촉했다.
"어차피 사람들이 내가 세상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겠나 싶다만."
살기만 감춘다면 말이지. 그의 말투는 마치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들렸다. 하기야 세상에 알려진 검은 마법사의 외형은 거대하고,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고, 굵은 쇠사슬이 옆에 있는 모습인데다가 그의 하얀마법사 시절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즉 이대로 나가도, 적어도 누가 검은 마법사를 보며 겁을 먹고 도망갈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일부러 그런건지 아님 당연해서 말을 하지 않은건지 그가 나에게 '넌 어차피 잊혀지니까 상관없잖아'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차원을 넘나들때마다 잊혀지고 사라지는 존재 덕분에 딱 군단장 일을 하면 좋을 텐데 그는 굳이 나에게 권유를 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팔짝 뛰며 미쳤냐고 할 소리지만 나는 그래도 그가 나름 생각해준 거라고 느꼈다.
"가서 뭐하려고."
"산책이지. 뭘 더 바래?"
검은 마법사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은 확실히 잘생긴 외모였지만 주변의 어두운 기운과 무표정이 한층 분위기를 가라앉게 보이게 하였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그대로 얼어버렸을 법한 차가운 표정이다.
그의 앞에 쓸려내려온 검은 머리가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나처럼 긴 장발이지만 나보다 훨씬 더 길고 부드러운. 대충 눈어림으로 보니 허리를 조금 넘을 것 같은 길이었다.
"가기싫어?"
조소를 지으며 검은 마법사가 물어온다. 그의 조소에 살짝 기분이 상한 나는 그를 조금 노려보며 아니거든? 하고 나즈막히 읊조렸다. 그에 검은 마법사는 조소를 지우고, 대신 아까의 차가운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 아주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은 나여서 이럴때마다 항상 속으로 놀라고는 한다. 내가 계속 뾰루퉁한 표정으로 서있자, 검은 마법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귀찮은 군단장 녀석들이 오기 전에 빨리 나가버리자."
심장이 뛸 정도로 나즈막하고 유혹적인 그의 목소리에 나는 결국 그에게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
[... 그렇다고 죽을 이유도 없잖아? 나랑 같이 가자. 찾아줄게, 살아갈 이유.]
따뜻했다. 차가운 내 손과는 달리 그의 손은 굉장이 따뜻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잡았던 손이 상상 이상으로 열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졌지. 이전에 홀로 떠돌아다닐 때 많이 겪어보았던, 그 차갑던 시선과 함정의 구렁텅이가 아닌 진실된 마음과 관심들. 프리드, 그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친구'라는 걸 만들어주었고 살아갈 이유도 찾아주었다. 그리고 난 그런 프리드가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스스로 재물이 되었다. 그 결과는 비록 끔찍하고 잔인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섯갈래길에 도착한 우리들은 차원의 포탈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에 우리들을 힐끗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검은 마법사는 신경쓰지 않는것 같았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기야 건장한 사내 둘이서, 그것도 장발인 남정네들이 나란히 걷는것은 조금 이상해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포털 앞에 서자 검은 마법사가 스스럼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당황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쭈볏거렸다. 이 포털 안으로 들어가면 왠지 검은 마법사마저 나를 잊어버릴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포털인가. 여기서 한발자국 더 움직여 안으로 들어간다면 또 다시 차원을 넘고, 존재가 지워진다는 고통을 맛보는 것이었다. 방금 지나가며 날 흘낏 본 사람들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마치 미우미우 마을 사람들과 헬레나처럼. 그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수도없이 많이 겪었다. 차원을 넘을 때마다 존재가 지워지고 이미 수없이 많은 인사를 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나를 소개하는 것은 정말 괴로웠다. 그게 바로 이 문 때문이었다.
툭. 누군가가 나를 밀치며 포털 안으로 들어간다. 네다섯명의 무리들이 자연스레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부럽다' 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아무런 걱정도 생각도 없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부러웠다. 그러다가 나는, 한동안 계속 서있다가 눈을 꾹 감고 그 포털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파란 하늘과 눈에 선명히 보이는 예쁜 행성. 판테온. 넘었다. 차원을 또다시 넘었다. 이제 저쪽 세상에서 난 또 더이상 존재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주위를 둘러보자 내 옆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마법사가 서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방금 포털 앞에서 한 그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만약, 이마저 나를 잊어버린다면..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하지만 역시 그 걱정은 필요 없다는 걸 알려주는 듯 그가 살짝 투덜댄다. 이럴때마다 가끔 이자가 진정으로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그 검은 마법사가 맞는지 의심이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안도감이 더 컸다.
"미안."
"가자."
검은 마법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이 살짝 휘어지도록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서 마치 누군가가 겹쳐보여 난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검은 옷 사이로 나와있는 새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 손을 잡았다.
따뜻해. 내 손이 차가운건지 그의 손이 뜨거운건지 몰라도 따뜻했다. 꼭 그때, 프리드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 때처럼. 조금 올라오는 감정에 난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놓고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내밀어주는 이 따뜻한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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