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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할 것만 같았던 방이,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위기를 바꾼 장본인은 검은 마법사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있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거친 숨을 골라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침대 이불을 꼭 쥐고 있었다. 어찌나 꽉 쥐고 있었던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그래도 하얀 피부가 핏기가 없어지면서 더 하얘져 아예 창백해졌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창문 사이로 옅게 흩뿌려지는 푸른 새벽빛에 붉은 가넷색 눈동자가 반짝인다. 하지만 언제나 차갑고 곧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없고 오히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눈이 자리잡고 있었다. 옆에 다른 누군가가 깨어있었다면 그 주인공이 제 아무리 잔혹하고 냉정한 검은 마법사라고 해도 걱정했을만큼. 

검은 마법사는 무릎을 모아 가슴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 심호흡을 하듯 깊게 숨을 들이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이 덜덜 떨리고 손도 떨리는 것이, 아무래도 진정하기에는 힘들어보였다. 두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하고서 다시 한번 진정하려는 듯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그래도 진정이 되질 않자 결국 두 손으로 눈을 감싸고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그는 자세를 풀고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사람은 아직 자고 있는 듯 약간 입을 벌리고 고른 숨을 뱉어내고 있었고 이불의 감촉이 좋은건지 아니면 지금 꾸고 있는 꿈이 좋은건지 이따금 잠꼬대를 하며 미소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자 검은 마법사도 저도 모르게 따라서 미소지었다. 그는 남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해주며 이리저리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는 남자의 뺨에 손을 올려놓는다. 손을 향해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는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덜덜 떨리던 손이 잠잠해지고 흔들리던 눈빛이 점차 평안해졌다. 검은 마법사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여 정수리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은월."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입안에 담아본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부드러웠고 또한 나지막했다. 한번 부르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계속해서 불렀다. 은월. 은월. 
아주 작게,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빠져나왔는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는 몸을 잠시 뒤척이다가 눈커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원래라면 보랏빛으로 빛났어야 할 눈동자가 어둠과 새벽빛에 묻혀 까맣게 보였다. 

"미안하다.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니 괜찮아. 그럼 미안하지만 조금 더 눈 붙여도 될까." 

"물론. 때가 되면 깨워줄테니." 

싱긋. 부드러운 말투에 은월이 살짝 미소지었다. 검은 마법사는 몸을 움직여 그의 옆에 눕고선 그를 살짝 끌어당겨 안았다. 은월 또한 검은 마법사에게 더 몸을 가까이 하면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머리 위에 입술을 여러번 떨어뜨리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리듬있는 손짓에 기분이 나른해져 그는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순간 검은 마법사의 눈에 이채가 돌았지만 은월은 깨닫지 못했다. 



은월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검은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3일째. 3일째 검은 마법사 그는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주변인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주변인이라고 해봤자 군단장들 뿐이었지만. 평소에 충성심 빼면 시체라고 해도 될만큼의 그들조차 검은 마법사의 행동에 지치는 기색을 보일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는 눈에 띄게 예민해지고 쉽게 신경질을 부렸다. 그리고 자주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가만히 앉아만 있는 때도 있었고 자는 도중에도 몇번이고 중간에 깼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 공격마법을 시전하는 통에 신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닐 정도였다. 평소의 그와는 확연히 다른 행동들이었다. 군단장들이 은월에게 부탁을 하면서까지 이유를 캐내려고 하였지만 은월이 이유를 물어봐도 되돌아오는 건 그저 꼬옥 안아오는 품, 그 뿐이었다. 

은월이 검은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은 마법사가 읽고 있던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종이에 적힌 글을 제대로 읽을수가 없었다. 검은 마법사가 종이를 거꾸로 들고 있었던 탓이었다. 하... 은월이 작게 한숨쉰다. 점점 조금씩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그는 검은 마법사가 읽던 그 종이를 홱 하니 낚아챘다. 

"무슨 짓이지?" 

잠짓 엄한 얼굴로 은월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차피 안읽고 있는 거 다 알아. 종이 거꾸로 든 주제에 읽고 있는 척 하지마."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검은 마법사는 속으로 흠칫했다. 게다가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이 그토록 정신 없었나 싶기도 했다. 은월은 또다시 한숨을 쉬고 검은 마법사에게 말했다. 

"검은 마법사. 요즘 당신 이상해. 알아?" 

"하도 많이 들어서 알아." 

"알면서 왜 그래? 대체 이유가 뭐야?" 

은월이 조금은 짜증을 담아 검은 마법사에게 쏘아붙였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그이지만, 하도 답답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화를 낸 것이었다. 검은 마법사가 은월을 올려다보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터라 자연스레 시선은 위로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하게도 평소와는 너무나 달라서 은월은 그만 그 시선을 피했다. 빨리 대답해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시선을 도로 책상 위로 내리꽂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묘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깬 사람은 은월이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자신이 빼앗은 종이를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그리고 여전히 말 없는 검은 마법사를 노려보며 툴툴거렸다. 

"됐다. 말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돼. 억지로 강요하진 않을테니." 

그럼 나 먼저 나간다. 은월이 이 말을 하며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몸이 무거운 것이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었다. 가끔은 의지하고 기대도 좋을텐데 혼자서 다 해결하려는 게 여간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물어봐야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는 몇발자국 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야했다. 검은 마법사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놔주지 않은 탓이었다. 휙 하고 검은 마법사가 손을 자신 쪽으로 당긴다. 갑작스런 힘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며 그대로 끌려간 은월은 덥썩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버렸다. 놀람과 부끄러움이 섞여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ㅁ...뭐하는거지? 이거 놔." 

"....." 

당황하여 어버버 거리며 빠져나오려 해도 단단히 감은 팔에서 나가기란 경험 상 불가능이었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해적계열이라 힘은 왠만큼 자신있는 은월조차 당하지 못했다. 그는 몇번 저항하다 몸을 비트는 걸 포기하고 가만히 안겨 그의 체온을 느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머리 곳곳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은월."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이 하나하나 소중한 일상이 마치 얼마 가지않아 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은월은 저도 모르게 검은 마법사를 마주안았다. 

검은 마법사는 은월을 안고 있는 도중에도 계속 떠오르는 장면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이런 적은 많다. 수백년 전 륀느의 힘을 빼앗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겪었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는 힘. 그 미래는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때도 있지만 제일 많이 나타나는 형태는 꿈이었다. 가까운 미래부터 먼 훗날까지 범위는 다양했으며 게다가 자신이 연루되지 않는 상황이면 바꿀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달라도 정말 끔찍한 방향으로 달랐다. 

"은월."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팔을 더 단단히 했다. 은월 또한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대었다. 영원했으면 좋겠어. 검은 마법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계속 신경쓰이게도 마음속의 응어리가 터질듯 말듯 아릿거렸다. 
이번에는 꿈에서 은월이 나왔다. 항상 자신의 곁에서 지켜주는 그런 듬직한 모습으로. 하지만 미래에서 그가 보인다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은월, 그는 자신을 향해 밝게 웃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웃음과는 반대되는 상황이 더 뚜렷했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 밖에 없는 주변의 소음. 마법명을 부르며 시전하는 마법사들과 이리저리 쏘아지는 화살의 바람소리. 둔탁한 소리를 내며 꽂히는 검. 그리고...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 보이자마자 반사적으로 꼭 껴안는 은월의 온기까지. 꿈의 끝은 그런 그가 무너지는 것에서 끝이 났다. 


"아아... 은월." 

다시 한번 그 장면이 상기되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가 쳐졌다. 기분같아서는 왠지 모든 걸 내려놓고 펑펑 울고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월은 그저 꼭 안은 채 등을 쓸어줄 뿐이었다. 
은월이라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 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물어볼 분위기도 아닌 것 같았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원래 검은 마법사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채, 마치 감정을 조절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그대로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은월에게 오히려 더 큰 걱정과 염려를 끼쳤다. 어째서 같이 짊어질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 앓는지 은월의 입장에서는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당신,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 

"혼자서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은월의 나즈막한 말에 검은 마법사는 가슴 안에 돌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은월을 두르던 팔에 힘을 빼고, 대신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심금을 울리는 듯한 말 한마디에 가슴속의 응어리가 요동친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 심하게. 본능적으로 그것이 터져버리는게 두려워 일부러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을 감았다. 평생 자신은 겪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감정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또한 떨리기도 했다. 한동안 감정을 억누르다가 검은 마법사는 눈을 뜨고 일부러 작게 웃으며 은월의 뺨을 쓰다듬었다. 은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약간은 원망스러운지 조금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피 하루이틀 지나면 풀릴 터였다. 


검은 마법사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더욱 이상한 증세를 보였다. 은월이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극도로 불안해했고 전보다 더 예민해졌다. 잠을 자면 꿈에 항상 그 장면이 나와버리는 바람에 아예 밤을 새는 날도 잦아졌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검은 마법사가 어느 날부턴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은월은 몇일 동안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원래 검은 마법사는 자신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는 스타일이었고 더군다나 곧 결전의 날이다. 그를 훼방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다가 곧 있으면 나올거라 생각했다. 좀 더 결계를 굳게 하고 더 강한 마법을 연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을 땐 시간이 꽤 지난 날이었다. 우연히 연구실 쪽을 지나가다가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남성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 목소리는 바로 검은 마법사, 그의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은월이 뛰어가 살펴보니 연구실 안은 엉망진창이었고 그 넓은 방 한 가운데에서 검은 마법사는 거친 숨을 몰아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찢긴 종이조각, 유리 파편.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은월은 섵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검은 마법사는 연구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장면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뚜렷해졌다. 곧 다가올 미래라는 듯이. 그렇게 은월의 죽음은 올가미처럼 점점 자신을 세게 조여왔다. 막아야한다. 막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막고 싶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것이 시간의 초월자의 숙명. 그렇기에 륀느 그녀도 봉인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 연두색의 긴 화살은 어찌 되었든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이 분명했고 그 화살을 그냥 두고 볼 은월이 아니었다. 검은 마법사는 과거에 자신의 숙명을 바꿀 수 없었던 륀느를 비웃었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본 륀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과 같이 절망했을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검은 마법사는 당시 그녀를 봉인할 때의 일을 잠시나마 회상하며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 물어뜯지 마." 

어느 새 은월이 다가와 그의 손을 살짝 내리쳤다. 방금 씻고 나온 참인지 항상 입던 검은 옷이 아닌 통이 큰 하얀 가운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며 털어낸다. 덜 마른 그의 고동색 머리는 비단결마냥 곱고 부드러워 보였다. 검은 마법사는 순간 은월의 머리카락을 만지려던 손을 자각하고 재빨리 내렸다. 

"당신 요새 왜 그래? 결전의 날 때문이야? 그래서 그렇게 불안해 하고 있는건가?" 

은월이 검은 마법사를 향해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어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에 검은 마법사는 쓰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런걸지도." 

"당신답지 않군." 

그런가. 검은 마법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사락 하며 그가 앉은 시트에 깊은 주름이 진다. 그러자 무척이나 긴 흑발이 목과 등을 지나고도 남아 하얀 침대시트에 펼쳐졌다. 흑과 백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인 양 무척 잘 어울린다고, 순간 검은 마법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월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계속해서 닦으며 옆에 가 앉았다. 그가 가까이 오자 깨끗한 물내음과 함께 인위적인 향이 물씬 풍긴다. 검은 마법사보다는 짧지만 그래도 길고 예쁜 고동색 머리를 계속해서 수건으로 비볐다. 샤워 직후라 그럴까. 평소보다 더 끌리는 모습에 검은 마법사는 빤히 은월을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려 '할 말 있어?' 라는 눈빛을 보냈다. 

"은월." 

"왜 불러." 

"냉정하군. 가끔은 부드럽게 대답해줘도 좋잖아." 

"하... 닥쳐. 정말 어이가 없군 그래." 

은월이 짜증을 내며 검은 마법사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눈빛에 겁 먹을 그가 아니다. 오히려 웃음으로 되받아치고는 부드럽게 품에 그러안았다. 자신의 품 안에 가만히 남아있는 온기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해서, 마치 깨어질 듯 아슬아슬 한 것만 같아 유리 가공품 만지듯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그러자 그의 손에, 머리카락에 남아있던 물기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항상 그에게 받는 애정표현이자 스킨십이었지만 은월은 왠지 모를 다른 분위기 탓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불쾌함이나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검은 마법사가 피부를 닿아오고, 자신에게 해주는 표현들을 은월은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은월." 

아직 자신의 그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은월에게 검은 마법사가 말해왔다. 

".......왜." 

"시간을, 멈출 수 있었으면 좋겠어." 

"....."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안겨 검은 마법사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저 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진지했다. 뒷말을 더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검은 마법사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놓지 않겠다는 듯이 세게 꼭 끌어안았다. 좀 더 오랫동안 온기를 느끼고 싶었고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고 더 오랫동안 옆에 있고 싶었다. 그저 그것 뿐인데 터무니없이 사소한 일상과 행복마저 빼앗아가려는 운명이 너무나도 악되고 원망스러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검은 마법사는 품에서 은월을 살짝 떨어뜨린 뒤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몸이 이끌리는대로 그렇게 조금씩 그를 탐했다. 살짝 밀치려던 은월의 하얀 손도 어느 새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입맞춤은 점차 짙어졌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나는 바닷물처럼 더욱 갈급하다는 듯 격렬히 원했다. 좀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생각과 어느 샌가 어디로 홀연히 가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도 생겨 조급함이 더해진 것 같기도 하다. 부드럽게 침대 위로 쓰러뜨려 은월의 몸 위에 올라 키스를 하며 검은 마법사는 그의 목, 뺨, 쇄골 부근에도 입술을 떨어뜨렸다. 옷 아래로 손을 넣어 허리를 지분거리며 살짝 고개를 들어 은월을 내려다보았다. 입맞춤의 잔재가 남아있는 탓일까. 붉게 상기되어있는 그의 얼굴이, 취침조명빛을 받아 더욱 붉어보였다. 자신을 향한 자안을 보며 검은 마법사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마음속에 엉켜있는 어떤 무언가가 계속 터지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도 계속 받아왔던 그런 이상한 감정에 검은 마법사는 거부감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이대로 온 몸을 맡기고 싶단 생각에 이르렀다. 

어...? 
은월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눈을 크게 떴다. 차가운 것이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손을 움직여 자신의 눈 언저리를 만져보았다. 그러자 손가락에 분명히 묻어나오는 물기. 검은 마법사 또한 놀랐는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떠보였다. 그 탓에, 또다시 은월은 자신의 뺨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여러개 느껴버리고 말았다. 

"거..검은 마법사...?" 

"아..." 

그가 검은 마법사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느릿느릿 조심스레 움직여 부드럽게 얼굴을 감쌌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은월이 떨리는 손으로 검은 마법사의 눈가를 쓸었다. 

"....왜 그래...." 

"은월.... 나... 은월...." 

그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눈을 감고 몸을 움직여 은월을 꼬옥 안았다. 그 바람에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가 은월에게 쏟아졌다.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목에 얼굴을 묻고 체향을 맡으며 눈에서 떨어지는 이질적인 느낌을 계속해서 느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점차 많아져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울음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저도 모르게 그만 엉엉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려버린다. 어린 아이처럼 매달린 채 가슴 속의 모든 응어리를 풀어내려는 듯.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허리를 감싼 채 계속해서 어깨를 떨었고 은월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면서도 그를 토닥이기에 바빴다. 

"미안...미안해 은월... 미안해...연구가....시간의 힘 때문에....하지 말걸... 연두색이..." 

"진정해, 검은 마법사. 쉬이... 쉬...." 

너무 큰 감정 탓일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않는 말을 늘어놓는 검은 마법사를 은월이 조용히 진정시켰다. 등을 토닥거려주다가 부드럽게 쓸며 연신 진정하란 말을 속삭여주었다. 은월 또한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눈을 커다랗게 뜨며 깜빡거렸다. 귀를 통해 들려오는, 처음 듣는 그의 약한 소리를 들으며 은월은 검은 마법사의 옷깃을 꽉 쥐었다. 





+) 

우레같은 함성소리도, 주변의 그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바닥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온 몸을 통해 느껴질 뿐, 다른 감각은 죽어버린 듯 작동하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이 자신의 앞에 있는 은월, 그의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일상 생활에서 항상 자고 일어나면 보이는 그런 편안한 얼굴이었다. 고통이라던가 불쾌감 같은 것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은 그런 표정이다. 그 점에 안도하며 검은 마법사는 손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손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 은월의 얼굴에 손을 뻗는 것은 힘들었다. 저번에도 느꼈던, 가슴 속의 응어리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눈 앞이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짐과 동시에 다시 시야가 또렷해진다. 미안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억지로 소리를 내어 미안하단 말을 건넸다. 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계속해서 그 말만을 되풀이한다. 지켜주겠다고, 꼭 미래를 바꿔버리겠다고 약속했건만 그것조차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자신이 이 말을 했을 때의 은월의 표정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아 괴로웠다. 

출혈때문인가. 아니면 눈물 때문인가. 시야가 점차 흐릿해진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눈 앞의 은월 또한 잔상이 점차 흐려졌다. 의식이 점차 깊은 수마로 가라앉는 것이 느껴지며 검은 마법사는 어둠에, 그리고 또다른 빛에 몸을 그대로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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