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 이제 그만 놓지..?'
'하지만 꽤나 감촉이 좋다고.'
'난 잘 모르겠는데.'
'손질을 안하니까 그렇잖아. 네 머리, 마치 나무를 보는 것 같아. 색이 너무 예뻐.'
'나무가 뭐야 나무가........자르려 했는데.'
'뭐??? 안돼, 절대 자르지 마. 절대로!'
헛.
은월이 숨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 몸은 땀범벅이었다. 땀으로 인해 축축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떼어냈다. 손에 착착 감기는 긴 머리를 보면서 아까 꾸었던 꿈을 다시 상기시켰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꾸는 그의 꿈에 마음속에서 슬며시 아련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돌아선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그가 생각날 때마다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언가 뾰족한 것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거두어주고 이름까지 준 프리드는 은월에게 있어서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등지고 다른 이에게, 그것도 그 다른이가 프리드가 평생을 바쳐 봉인하려 했던 남자라는 사실은 항상 목을 옥죄어왔다. 이불에 땀범벅이 된 얼굴을 파묻으며 시원한 감촉을 느꼈다. 주먹을 꼭 쥐자 반듯했던 이불에 주름이 지며 구깃해졌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긴 머리를 쓸어내리다가 이내 꽉 잡았다. 머리가 당겨지는 고통이 따랐지만 그것을 신경쓸 겨를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은월."
다음날 정신없이 할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은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언제나 그렇듯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그가 서있었다. 새까만 로브에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 깨끗한 붉은 눈동자까지.
검은 마법사. 은월이 작게 웃으며 그의 호칭을 불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망설임없이 은월을 꼭 안았다. 은월 자신이 작은 키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보다 얼굴 하나는 더 컸다.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그대로 몸을 늘어뜨리니 그가 허리를 단단히 감고 지탱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얹히는 것도. 수고했다, 이제 좀 쉬어. 부드러운 목소리에 은월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수마에 잠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계속 아른거리는 프리드의 얼굴에 계속 내려가려는 눈커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그건 생각보다 꽤 힘들었다.
"억지로 깨지 않아도 된다. 피곤하면 들어가."
"알고 있어. 하지만..."
다시 꿈에 나올 것 같아. 은월은 뒷말을 삼키고서 검은 마법사의 옷깃을 꽈악 쥐었다. 은월? 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아른거리는 얼굴을 애써 밀어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울고있었다. 바닥에 쪼그려앉아서 붉은 로브의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작게 울고있었다. 온통 새하얀 방에서, 아니 공간에서 그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조심스레 다가가 앞에 마주보며 앉았다. 그러자마자 그가 고개를 들고, 그의 깨끗한 벽안과 자신의 자안이 쨍하고 마주쳤다.
'어째서 그런거야, —?'
순식간에 새하얬던 공간이 붉게 물들어간다.
'어째서 날 배신한거야?'
'아니, 아니야 프리드. 난....!'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몸이 파들파들 떨리며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두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려고 필사적이었다. 프리드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난 그에게 갔을까? 아니면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까. 어쩌면 지금은, 프리드의 대용으로 검은 마법사를 선택한 걸지도 몰랐다. 프리드의 꿈만으로도 크게 동요하는 행동이 그 증거였다. 또한 프리드가 좋아했던, 이 긴 고동색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은월은 저 스스로가 무척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벌컥 하고 방문이 열리는게 들렸다. 자신의 비명소리를 들은건지 문 앞에는 검은 마법사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해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이젠 프리드 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려다 은월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흠칫 하며 몸을 멈추는게 보였다. 걱정 끼치고 싶진 않은데. 은월은 이렇게 생각하며 얼른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
은월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다가와 은월의 옆에 앉고서 두팔 가득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여주며 마치 아기 달래듯 앞뒤로 왔다갔다 거리자 이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거리던 몸이 멈췄다.
"......몇시야?"
"다섯 시."
"..........아침까지 있어줘."
"네가 원한다면."
짧은 대화지만 은월은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프리드와는 다른,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지는게 느껴졌고 온 몸이 진정됐다. 검은 마법사는 좀 더 은월을 세게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은월은, 저를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내던 프리드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품을 파고들었다. 어째서 날 배신한거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웽웽거렸다.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부정의 말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프리드의 얼굴은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눈만 감았다 하면 그의 표정이 떠오르는 통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툭 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리워서, 보고싶어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 흐르는 눈물이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막고 스스로를 달래며 다독여봐도 이미 크게 흔들린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검은 마법사가 모를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지."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옆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마침 꿈에 나온 프리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여서 뜨끔하고 몸이 흠칫거렸다. 하지만 은월은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한 적안을 보고 거짓말 할 용기는 없었다. 아예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게 더욱 기폭제가 된건지 검은 마법사가 목소리를 깔며 다시 말한다. 내 눈 보며 말해.
은월이 눈을 살며시 떠 검은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적안을 가까스레 쳐다보며 모기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됐어."
그가 은월에게 짧게 입맞추며 말했다. 아직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적어도 차가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그대로 기대자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
"......."
조용한 침묵이 방 안에 가라앉았다.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이따금 손가락을 이용해 빗어내렸다. 곱슬기가 전혀 없는 은월의 머리는 엉킴 없이 부드럽게 빗어졌고 그걸 검은 마법사는 여러 번 반복했다. 은월은 그의 행동이 마치 예전에 프리드가 자주 해주었던 행동같아서, 그래서 프리드가 투영되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차마 하지말라고 뿌리칠 수 없어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 뿐이었다. 코를 향해 들어오는 검은 마법사의 체향을 맡으며 애써 프리드가 아니야— 라고 상기시켰다.
"검은 마법사."
조금 뒤 은월이 입을 열었다.
"......머리 자를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인지 그가 뭐? 하고 반문하는게 들렸다. 쓰다듬어주던 손도 그대로 멈췄다. 머리 자를까 싶어서. 다시한번 말했다.
"자르기엔 조금 아깝군."
그가 은월의 긴 머리를 조금 잡고 아래로 쓸어내리며 말한다.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떨어뜨렸다.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몇번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다시 은월의 등 뒤로 넘겨주었다.
"하지만 네가 자르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그의 최종적인 대답이 들렸다.
"그래...?"
".......꼭 나무같아. 머리색이 정말 예쁘군."
은월이 화들짝 놀라며 기대었던 얼굴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듣자 가슴에 돌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투영되어 보이던 프리드의 모습은 어느샌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어두운 자안은 검은 마법사, 그 자체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은월이 아니었다. 그런거야, 그런거였어. 스스로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하하 하고 실없는 웃음을 자아냈다. 은월의 갑작스런 행동에 순간 놀란 그가 '왜 그래?'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입을 열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은월은, 그에게 작게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다시 기댔다.
오늘은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내고 있지도 않았다. 프리드는 항상 보여주었던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 걸맞게 조용히 말하고는 사라졌다. 선택은 네 몫이야.
아직 쌀쌀한 공기가 도는 새벽. 은월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가 꿈에 나오면서부터 처음 맞이하는 조용한 아침이었다. 선택은 네 몫이야, 라는 말이 아직 귓가에 생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옆에 검은 마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고서. 아마 늦게까지 연구를 하다가 정신없이 잠든 것 처럼 보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덮던 이불을 조심스레 덮어주고 턱 밑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고 겨우 잠든 듯한 그가 깨지않도록 조용히 빠져나왔다.
신전 밖으로 나와서 동 트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새벽빛을 붉은 태양빛이 점점 물들이는 것을 보며 은월은 쓴 웃음을 지었다. 프리드를 딱 한번. 딱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가볍게 하는 대화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긴 머리카락이 거꾸로 부는 바람 탓에 앞으로 휘날렸다. 거슬릴 법도 하건만 왜인지 그는 가만히 서있었다. 마치 굳은 결심을 한 것 처럼 그렇게 강한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월이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고정시키고 뒤로 하여 한 손으로 잡았다. 남자치고 많은 머리숱이 그대로 느껴지며, 새삼스레 자신이 아주 어릴때부터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냈다. 몇년을 자란걸까, 이 머리는. 마지막으로 손질하던 때를 기억하려 애썼지만 그러기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무리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프리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안. 미안해, 프리드. 영원히 닿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그대로, 너클을 이용하여 긴 머리를 서걱 잘라냈다.
이십 몇년동안 자신의 신체일부였던 머리카락이 그대로 떨어져나갔다. 계속 불어오던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그는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허전하면서도, 개운함이 동시에 밀려들어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기고,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원래라면 계속되어야 할 빗질이 목 부근에서 끊기자 약간은 서운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으리라고, 그리고 후회해서도 안된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는 느낌에 은월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길고 칠흑처럼 검은 그의 머리카락이 자신을 향해 살랑거리는게 보였다. 검은 마법사, 그는 작게 웃으며 은월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은월이 어색한 듯 머리를 계속 손으로 쓸어내리자 검은 마법사의 눈이 예쁘게 휘며 눈웃음을 그렸다. 그리고
"잘 어울려."
라고 나즈막히 속삭이며 머리카락 위에 짧은 입맞춤을 여러번 떨어뜨렸다. 그 감촉이 좋아 은월은 기분좋은 웃음을 그려냈다.
"조금 삐뚤한데..."
"나중에 다시 손질하면 돼."
그리고 그렇게 비뚤하진 않아. 검은 마법사가 속삭이며 낮게 웃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그와 짧게 입맞추며,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을 맡겼다.
은월은 계속 그에게 안긴 채로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단단히 감은 팔에 손을 올려놓으며 어딘가로 계속 날아가고 있을 머리카락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사람 사는 곳에 떨어지면 그 사람들 무서워 할텐데. 지붕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차라리 바다에 떨어져 파도가 숨겨주었으면. 넓디 넓은 숲에 떨어지는 것도 낫겠다.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자신의 긴 머리를 아껴주고 좋아하던 그의 얼굴도 떠올랐다. 여전히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아렸지만 이젠 바뀌어야했다. 은월은 눈을 감고, 항상 저를 향해 웃어주던 프리드를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지워냈다. 안녕. 들리지 않을, 닿지 않을 말을 그에게 마음속으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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