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주제 : 붉음
붉다.
눈은 '붉음'을 받아들이고 뇌는 '불쾌하다'라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온 주변이 붉은 색으로 가득찬 그 자리에서, 은월 그는 혼자 서있었다. 눈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길어버린 앞머리때문에 누군지 못알아볼 것도 같았지만 변하지 않은 아름다운 고동색의 장발덕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머리가 눈을 가려 불편할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그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주변이 붉은 이유가 은월이라는 걸 알리듯 그의 옷에도 붉은 자국과 상처들이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분명 사람 안에서 흐르고 있었을 그 따뜻한 것은 이미 차갑게 식어 피부나 옷에 달라붙은지 오래였다. 참혹한 배경을 바탕으로 서있는 그는 누가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하아.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할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자신의 너클을 손목에서 빼내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툭. 너클은 이미 마찬가지로 붉게 변해버린 잔디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아무것도 차고 있지 않은 그의 팔도 힘없이 늘어졌다. 찍찍 달라붙는 느낌이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짜증나."
얼른 돌아가 다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붉은 빛이 생각보다 너무 강렬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을 꾹 감아도 앞에 아른아른 잔상이 남는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은월은 도통 나아지지 않는 아픈 머리를 잡고 잠시 기댈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었다. 원체 나무가 많은 곳이라, 어렵지 않게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쓰러질듯 말듯 위태롭게 걸어가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희생자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걸어간다. 많은 적들을, 한때는 동료였던 많은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엄청난 마나와 체력을 소모한 탓일까. 아니면 아직도 쓸데없는 감정이 남아있는 탓일까. 속이 답답한 것이 모든 걸 게워내고 싶은 충동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바로 앞에 있는 나무까지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며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이 울렁거렸다. 축지를 이용해 금방 갈 수 있었지만 머리가 아픈 상태에서 그런 체계적인 사고가 나올리 없었다. 결국 얼마 못 가 머리가 띵 하고 울리며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앗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면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무의식중으로 눈을 꾹 감아 곧 온 몸을 엄습할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던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받치더니, 붕 뜨는 기분과 함께 포근하고 따뜻한 곳에 안기는게 느껴졌다. 덕분에 다행히도 잔디밭에 충돌하여 쓰러지는 그런 꼴사나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검은 옷이 시야에 들어옴과 동시에 익숙한 체향이 맡아졌다. 상대방이 누군지 자각하자마자 마음이 평온해지더니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마저 사라지듯 사그러들었다. 싱긋. 저도 모르게 그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 마법사."
"모조리 없앤건가. 무리했군. 니가 쓰러질 정도니."
검은 마법사는 은월을 안았던 팔을 풀고 대신 그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한동안 그의 몸을 살피듯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의 몸이나 옷에 묻은 붉은빛이 은월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너무 길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앞머리를 손으로 정리해준다. 하지만 은월은 그건 싫은지 고개를 저어 다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검은 마법사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가 곧 다시 원래 표정을 되찾았다.
"피곤해.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은월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검은 마법사에게 안겨오며 말했다. 검은 마법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파고드는 모습에 그 또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따뜻한 손길에 은월은 한동안 가만히 그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그는 검은 마법사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마법사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품 속의 어둠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들어온 빛 때문일까. 눈가가 시리며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아 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자,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며 원모양으로 살살 문지르며 달랬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무리한거 아니야. 그저 피곤할 뿐이다."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
부드럽다. 검은 마법사의 눈은 부드러웠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부드러워서일까. 분명 주변과 같은 붉은 색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강렬하지 않으면서 강렬하고, 드세면서도 부드러운. 아아, 같은 붉은 색임에도 이렇게 다를수가.
"후회하진 않아?"
검은 마법사가 조용히 물어왔다. 은월은 잠시동안 그의 말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싱긋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듯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마치 일부러 보여주려 그런 듯, 은월의 눈을 거의 덮고 있던 앞머리가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그럴리가."
은월의 눈이 예쁘게 휘어지며 웃음을 그려냈다.
마치 옅은 밤하늘에 노을이 남아있는 듯하다. 검은 마법사는 바람 덕에 보여진 은월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바람이 멈추고 도로 앞머리가 내려앉으려 하자 손을 들어 막는다. 이번에는 은월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앞머리를 옆으로 손빗질을 하며 눈이 보이도록 걷어냈다. 자안 속에 붉은 빛이 일렁이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검은 마법사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살짝 움직여 은월의 눈커풀 위에 입술을 떨어뜨린다. 점점 자신과 닮아가는 그를 보니 묘한 흥분감과 안도감이 들어 몸이 떨려왔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 알아주면 좋으련만.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검은 마법사는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을 터뜨린 채 그대로 은월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이제 넌 곧, 나만의—.
붉은 빛이 시야를 감싸며 황홀한 기분에 휩싸였다
붉다.
눈은 '붉음'을 받아들이고 뇌는 '불쾌하다'라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온 주변이 붉은 색으로 가득찬 그 자리에서, 은월 그는 혼자 서있었다. 눈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길어버린 앞머리때문에 누군지 못알아볼 것도 같았지만 변하지 않은 아름다운 고동색의 장발덕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머리가 눈을 가려 불편할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그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주변이 붉은 이유가 은월이라는 걸 알리듯 그의 옷에도 붉은 자국과 상처들이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분명 사람 안에서 흐르고 있었을 그 따뜻한 것은 이미 차갑게 식어 피부나 옷에 달라붙은지 오래였다. 참혹한 배경을 바탕으로 서있는 그는 누가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하아.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할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자신의 너클을 손목에서 빼내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툭. 너클은 이미 마찬가지로 붉게 변해버린 잔디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아무것도 차고 있지 않은 그의 팔도 힘없이 늘어졌다. 찍찍 달라붙는 느낌이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짜증나."
얼른 돌아가 다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붉은 빛이 생각보다 너무 강렬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을 꾹 감아도 앞에 아른아른 잔상이 남는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은월은 도통 나아지지 않는 아픈 머리를 잡고 잠시 기댈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었다. 원체 나무가 많은 곳이라, 어렵지 않게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쓰러질듯 말듯 위태롭게 걸어가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희생자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걸어간다. 많은 적들을, 한때는 동료였던 많은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엄청난 마나와 체력을 소모한 탓일까. 아니면 아직도 쓸데없는 감정이 남아있는 탓일까. 속이 답답한 것이 모든 걸 게워내고 싶은 충동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바로 앞에 있는 나무까지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며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이 울렁거렸다. 축지를 이용해 금방 갈 수 있었지만 머리가 아픈 상태에서 그런 체계적인 사고가 나올리 없었다. 결국 얼마 못 가 머리가 띵 하고 울리며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앗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면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무의식중으로 눈을 꾹 감아 곧 온 몸을 엄습할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던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받치더니, 붕 뜨는 기분과 함께 포근하고 따뜻한 곳에 안기는게 느껴졌다. 덕분에 다행히도 잔디밭에 충돌하여 쓰러지는 그런 꼴사나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검은 옷이 시야에 들어옴과 동시에 익숙한 체향이 맡아졌다. 상대방이 누군지 자각하자마자 마음이 평온해지더니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마저 사라지듯 사그러들었다. 싱긋. 저도 모르게 그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 마법사."
"모조리 없앤건가. 무리했군. 니가 쓰러질 정도니."
검은 마법사는 은월을 안았던 팔을 풀고 대신 그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한동안 그의 몸을 살피듯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의 몸이나 옷에 묻은 붉은빛이 은월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너무 길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앞머리를 손으로 정리해준다. 하지만 은월은 그건 싫은지 고개를 저어 다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검은 마법사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가 곧 다시 원래 표정을 되찾았다.
"피곤해.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은월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검은 마법사에게 안겨오며 말했다. 검은 마법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파고드는 모습에 그 또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따뜻한 손길에 은월은 한동안 가만히 그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그는 검은 마법사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마법사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품 속의 어둠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들어온 빛 때문일까. 눈가가 시리며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아 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자,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며 원모양으로 살살 문지르며 달랬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무리한거 아니야. 그저 피곤할 뿐이다."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
부드럽다. 검은 마법사의 눈은 부드러웠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부드러워서일까. 분명 주변과 같은 붉은 색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강렬하지 않으면서 강렬하고, 드세면서도 부드러운. 아아, 같은 붉은 색임에도 이렇게 다를수가.
"후회하진 않아?"
검은 마법사가 조용히 물어왔다. 은월은 잠시동안 그의 말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싱긋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듯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마치 일부러 보여주려 그런 듯, 은월의 눈을 거의 덮고 있던 앞머리가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그럴리가."
은월의 눈이 예쁘게 휘어지며 웃음을 그려냈다.
마치 옅은 밤하늘에 노을이 남아있는 듯하다. 검은 마법사는 바람 덕에 보여진 은월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바람이 멈추고 도로 앞머리가 내려앉으려 하자 손을 들어 막는다. 이번에는 은월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앞머리를 옆으로 손빗질을 하며 눈이 보이도록 걷어냈다. 자안 속에 붉은 빛이 일렁이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검은 마법사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살짝 움직여 은월의 눈커풀 위에 입술을 떨어뜨린다. 점점 자신과 닮아가는 그를 보니 묘한 흥분감과 안도감이 들어 몸이 떨려왔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 알아주면 좋으련만.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검은 마법사는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을 터뜨린 채 그대로 은월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이제 넌 곧, 나만의—.
붉은 빛이 시야를 감싸며 황홀한 기분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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