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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주제 : 책












어두웠다. 예전에 은월이 사용했다던 집은 작고 어두웠다. 햇빛이 없는, 저녁이나 밤이면 한치 앞도 안 보일 것이 분명할 그 작은 곳에서, 촛불 하나로 방을 밝혔을 은월을 생각하니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팬텀 뒤로, 루미너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선 말한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팬텀. 
루미너스가 팬텀에게 좀도둑이라는 별명을 붙이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한 명 정도는 놀라줘야 하건만 지금 그들은 그런 것까지 놀랄 정도의 상황은 못되었다. 그건 당사자인 팬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별말 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 메르세데스는 아란의 망토를 끌어잡았따. 축축한 느낌이 팔과 피부에 감기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루미너스의 오브에 의지하며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구석마다 루미너스가 빛을 두고 나서야 방 안이 밝아졌다. 집 안에 들어가도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입을 열지 않고 묵묵하게 가만히 서있기만 하였다. 집 분위기만큼이나 어두운 공기에 에반은 루미너스 뒤에서 눈치를 살폈다. 그런 에반을 눈치채고 정적은 깬 사람은 아란이었다. 

"자, 이제 가지고 가자. 침대나 책상은 놔둬도 되겠지? 우린 천하장사가 아니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녀의 실없고 어색한 웃음이 들려왔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보려는 아란의 노력이 고마워 다들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조금은 풀어진 듯한 분위기 속에서 팬텀은 속으로 말했다. 물건들 좀 가지고 갈게.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들리지 않을 말을 전했다. 

물건들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은월이 팬텀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원래 성격 자체가 사치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생필품, 여러가지 책, 그리고 프리드의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반지와 푸른색 팬던트. 은월의 물건들은 생각보다 적어 두 상자에 담으니 딱 맞는 양이었다. 아란이 한 상자를, 그리고 다른 한 상자는 루미너스가 들기로 했다. 탁자와 침대밖에 남지 않은 텅 빈 집은 너무 휑해 쓸쓸해보였다. 팬텀은 빈 집을 계속해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팬텀 하고 루미너스가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갈까? 귀환서는 가지고 있지?" 

메르세데스가 귀환서로 보이는 종이를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 미안한데, 먼저 가 있을래? 나 조금 있다가 돌아갈테니까." 

팬텀의 말에 모두들 살짝 당황한 듯 싶었다. 그러자 루미너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도 '어째서' 라는 말을 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아란이 그에게 눈치를 주며 막고 팬텀을 향해 웃어보이며 말했다. 알았어. 너무 늦지는 말라고. 메르세데스와 에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너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팬텀을 노려보고는 주머니에서 귀환서를 꺼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4명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팬텀은 그제서야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촛불을 켰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단 하나뿐인 촛대 위에 거의 다 써가는 촛불이 활활 잘도 타고 있었다. 하지만 촛불 주변이나 밝지, 저 구석구석에는 빛이 닿지 않아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아까 루미너스가 빛을 여러 개 놔뒀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어둡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무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 혼자 있고 싶었다. 차가운 공기가 올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바닥에 스며들어있던 습기가 묻는 것인지 등이 점점 차가워졌다. 쿱쿱한 곰팡이 냄새와 습기냄새 사이로 옅게나마 남아있는 은월 체취를 맡으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하아 하고 내쉬니 서늘한 바깥공기 탓에 입김이 하얗게 변하는게 보였다. 천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촛불색에 비춰져 붉은 빛이 아른거린다. 그 강렬한 빛 사이에도 존재를 알리는 듯, 천장 이곳 저곳에 냄새의 주원인일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습기 때문일까. 아까 물건들을 담을 때 언뜻 나무바닥 사이로 이끼도 본 것 같다. 생각보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더욱 열약한 환경에 팬텀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느 새 그는 페르소나를 벗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가만히 있으니 은월이 느꼈던 고독함, 쓸쓸함, 괴로움이 방 안에 남아 팬텀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문득 갑자기 느껴지는 쓰라림에 그는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분명 자신과 똑같은 이 장소에서,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걸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왔다. 
눈을 감아도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앞에서 아른거렸다. 더 가까이, 자세히 보고싶어 눈을 뜨면 어두침침한 천장만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다시 눈을 감고 스쳐지나가는 얼굴들을 최대한 주의깊게 집중해서 본다. 우리를 바라볼 때의 애틋한 표정, 항상 지어주는 슬픈 미소, 프리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웃으며 맞장구쳐주는 괴로움. 그리고, 항상 저를 향해 지어주던 따뜻한 웃음까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순간 울컥 하며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어쩌면 다신 볼 수 없단 극단적인 생각까지 이르며 참을 수 없이 괴로워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코가 시큰해졌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답답해졌다. 몸을 옆으로 돌려 새우처럼 살짝 허리를 구부리고, 필사적으로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삼킨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아프고 괴로워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어번 쳐야했지만. 

필사적인 팬텀의 노력에도, 눈물이 기어코 한 방울 떨어져 바닥에 톡 떨어진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점점 바닥에 방울이 토독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는 엉엉 어린 아이처럼 울며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울고 싶을 때는 참지 말고 엉엉 우는게 좋아.' 

예전에 은월이 해주었던 말. 그의 말대로, 팬텀은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으며 바닥의 먼지가 묻을 건 생각하지 않으며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 지어주던 미소가, 옆에 가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지어지던 바람냄새가 너무 그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크게 운건 얼마만인지, 아니 아마 생애 처음일 정도로 그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팬텀은 눈가를 닦고 거친 숨을 골랐다. 빨리 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걱정할 터였다. 울어버리다니... 아마 은월이 옆에 있었다면 말 없이 옆에 앉아 같이 있어주었을텐데.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의 생각에 팬텀은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번 했다. 나가는 길에 개울에서 세수라도 하고 가야지 라는 생각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무언가가 반짝 거리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그 반짝거리는 물체는 침대 아래에 있었다. 물건들을 챙길 때는 침대 아래까지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해서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촛불 불빛에 반짝이는 그 물건을 향해 팬텀은 손을 뻗었다. 그 물건은 어렵지 않게 닿았다. 손으로 잡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니 쉽게 제 손에 의하여 끌려나왔다. 

그 물건의 정체는 책이었다. 식탁에 가지고 가 앉아서 살펴보니 보라색 표지의 중간정도 두께의 책이었다. 먼지가 거의 없는 걸로 보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월은 이 책을 썼으리라. 팬텀은 책을 한장한장 넘기다가 이내 몸이 굳어진 듯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귀환서를 써서 에델슈타인에 도착했다. 분명 나올 때는 점심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도착한 이 곳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나. 은월의 집이 있는 곳은 온통 주변이 숲 뿐이어서 시간개념이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걸 보니 당황심이 들었다. 팬텀은 발걸음을 옮기다가 에반과 마주쳤다. 

"어, 팬텀형? 이제 오는거에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에반이 달려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어왔다. 

"아... 미안. 걱정끼쳤군. 다른 애들은?" 

"형 누나들이면 항상 그 곳에 있죠. 들어갈까요?" 

"아니. 아직. 밥 안 먹었지? 애들 데리고 나올래? 밥부터 먹자." 

에? 에반은 팬텀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팬텀의 의외의 말에 당황한 듯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곧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여기 꼭 있어야돼요! 신신당부를 하며 어디론가 뛰어가는 에반의 뒷모습을 보며 팬텀은 프리드를 잠시 떠올렸다. 에반에게는 미안하지만서도 그를 보면 프리드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반은 너무 많이 그와 닮아있었고 이젠 실력까지 늘어 그와 맞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정 반대인 모습이 프리드와 에반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프리드. 나, 어떡해야하지. 
보이지 않는 오랜 친구를 향해 그는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지만 당연하게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에델슈타인이 해방된지 일주일째. 블랙헤븐 이후 많은 걸 얻었다. 에델슈타인은 블랙윙의 해체라는 걸 얻었고 자유를 얻었다. 레지스탕스의 오랜 숙원과 목표를 이루었고 잠시지만 평화도 얻었다. 하지만 잃는 것도 있었다. 오르카 그녀는 자신의 쌍둥이 정령인 스우를 잃었고 팬텀의 크리스탈 가든은 크게 망가졌다. 또한 연합은 주요전력을 잃었고, 그와 동시에 영웅들은 그들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아니, 잃을 위기에 처했다. 

팬텀은 에반과 친구들과 함께 간단히 끼니를 떼웠다. 밥 먹는 도중에 팬텀은 언제 울었냐는 듯 밝게 웃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가끔 능글맞은 말도 해주며 예전의 팬텀으로 돌아간 양 행동했다. 다른 친구들 또한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고 웃었지만 유난히 루미너스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팬텀은 왠지 모를 위화감에 일부러 오버해가며 웃어댔고 그러면 그럴수록 루미너스가 그를 바라보는 표정은 점점 더 묘해졌다. 
밥을 다 먹고 향하는 길은 이미 어둑해져있었다. 평화로운 에델슈타인의 모습에 그들 다섯 명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이야기 주제라고 해봤자, 아란이 일부러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려 자신의 돌아오는 기억들을 말해주는 것 뿐이었지만 말이다. 
달이 떠오르는 듯 하늘 아래쪽이 밝다. 어느 새 늦어버린 시간에 팬텀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손에 들려있는 책을 만지작거린다. 이제 가는게 좋겠다 싶어 팬텀은 동료들에게 눈짓을 해주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나지? 나 이만 가볼게.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해주고는 그대로 뒤돌아 걸어갔다. 얼마 걸어가지 않고, '팬텀!' 하고 메르세데스가 불러세운다. 

"음?" 

"오늘 우린 없어도 돼?" 

"어. 오늘은 나 혼자 있고싶은걸." 

"치. 말은 잘해." 

아란이 팔짱을 끼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약간의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 미소를 알아차린 팬텀이 일부러 과장하며 웃었다. 

"하하하!! 너희들, 날 왜 걱정하냐? 내가 죽기라도 할까봐?" 

"하 참, 어이가 없네. 니가 죽을 애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있거든요?" 

"그럼 됐네요. 얼른 들어가서 자. 오늘은 왠지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아." 

메르세데스의 말에 팬텀이 맞장구를 쳐주며 손사래를 친다. 그의 손짓에 메르세데스와 아란, 에반은 손을 흔들어주며 어딘가 있는 자신들의 숙소(임시거처)를 향해 걸어간다. 하지만 루미너스는, 한동안 계속 팬텀을 빤히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 두 가지 반대되는 색이 교묘하게 잘 어울려 오히려 부담이 컸다. 팬텀은 짜증을 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 왜 그러는데 샌님." 

"내가 뭘. 그냥 니 그 책이 눈에 밟힐 뿐이야." 

"책?" 

팬텀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가 이내 제 손에 들려있는 책을 발견하고는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집에서 나올때 부터 지금까지 손에서 책을 놓고 있지 않았다.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듯이. 이 책은 말이야... 말 하려던 팬텀이 일순 말을 멈추고 루미너스를 바라본다. 

"설명하자면 기네. 좋은 추억만 담겨있는 건 아니라서." 

"....." 

이번에는 루미너스가 침묵했다. 마음을 알 수없는 오드아이로 마치 다른 사람의 마음은 꿰뚫는 것 같아 팬텀은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미너스는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별 말 없이 뒤돌아 친구들이 갔던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팬텀은 그런 루미너스의 뒤를 계속 눈으로 좇다가 자신도 발걸음을 옮겼다. 

루미너스는 계속 걷다 문득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팬텀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항상 봐왔던, 촐랑거리고 능글맞던 분위기가 아닌 어딘가 축 쳐져보이고 힘 없는 그런 분위기다. 그는 아까 낮에, 은월이 살던 집 안에서 크게 울던 팬텀을 떠올렸다. 당연하지만 들으려고 한 의도는 없었다. 그냥 하도 오지 않길래 뭐하길래 늦는거지 싶어 다시 간 것 뿐이었다. 설마 그 곳에서.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처음보는 그의 무너진 모습에 루미너스는 집 밖에 서서 들어가지 못했다. 새삼 팬텀 그에게 은월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은월의 존재가 돌아온 지금 물론 루미너스 자신도 괴로웠지만 그래도 팬텀이 훨씬 더 괴로울 터였다. 그리고 어제 팬텀이, 예전에 은월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무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고 말한 걸 생각해냈다. 모든 걸 잊어버린 것도 모자라 공격까지 했다. 게다가 팬텀과 은월은 수백년 전... 

루미너스는 머리를 세게 저었다.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는게 이유였다. 아무리 저와 팬텀이 죽고 못사는 원수 지간이라도 오랫동안 같이 지낸 동료다. 그가 슬퍼하는건 딱히 자기한테도 좋은 영향은 없었다. 상처받지 않길. 그는 신에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팬텀은 어딘가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보통 빠르기였다. 조급해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복도에 난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그의 발밑을 밝혀주었다. 그 달빛에 팬텀의 하얀 옷이 비춰져 반짝거렸다. 분명 그의 금발에도 빛이 비치면 예쁠것이었지만 지금 팬텀에게는 페르소나를 벗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는 점점 장소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손에 있는 책을 꼭 쥐었다. 

어느 문앞에 도착한 팬텀은 그 문 앞에 붙어있는 종이조각을 확인했다. 은월. 은월의 이름이 적혀있는 걸 계속 보고나서 심호흡을 하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내쉬고, 다시 들이쉬고, 내쉬고.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진 입근육을 손으로 풀었다. 볼을 잡아당기고 문지르며 어느정도 풀리자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그린다. 다시한번 책을 체크하고 옷 매무새를 다듬는게 마치 연인과 첫 데이트를 나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노크를 두번 하고서 손잡이를 돌려당겼다. 그리고는 은월? 하고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은 아까의 그 은월의 집만한 크기였다. 아무런 전기불도 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은 환했다. 아마 달빛이 환해서일거라고 팬텀은 생각했다. 
창가쪽에는 이동식 커튼으로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 커튼은 팬텀의 옷과 마찬가지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만 사실 무슨 색인지는 팬텀도 잘 알지 못했다. 낮에는 커튼을 걷어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밤에만 이렇게 쳐놨기 때문이었다. 푸르고 은빛이 잔잔한 빛이 비춰져, 커튼에는 어떤 사람의 그림자가 투영되고 있었다. 
팬텀은 다가가 커튼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촤르륵 하고 플라스틱 소재의 고리와 쇠막대가 마찰되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반 걷으니, 허리를 베개에 받치고 침대에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은월.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봐도, 그는 시선을 창 밖 달에 고정한 채 돌아보지 않았다. 

"달 보고 있었어? 목 아프겠다." 

팬텀이 그에게 다가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법도 한데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밖을 바라보고 있다. 팬텀은 익숙한 듯 웃으며 은월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뒤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살짝, 아주 잠시 은월이 팬텀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그의 어깨에 기대 본능적으로 파고들었다. 



블랙헤븐 당시, 은월을 살리기 위해 시그너스가 봉인석을 사용하자마자 팬텀은 어떤 이상한 기억에 머리가 아파왔다. 봉인석의 푸른빛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점점 스쳐지나가는 장면들. 누군가가 나의 창고에 들어왔다... 누구지?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그의 존재는 지각하지만 누구인지는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계속 이어들어오는 기억. 루미너스와 나에게 프리드가 화낼거라고 당부하던 사람...
넌 누구야?
나와 루미너스가 싸울때마다 막아주던 사람... 
대체.... 
그리고, 내가 처음 뵙겠습니다 라며 인사하자 같이 웃으며 손잡아주던 사람... 
찡— 하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욱 하고 헛구역질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옆에서 누군가가 괜찮아요? 라고 묻는게 들리는 듯 싶었지만 팬텀은 그가 누군지 조차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적진이었으면 완전 꼼짝없이 당했을 정도로 무방비였다. 서서히 두통이 가고 그에 비례하도록 점점 또렷해지는 그 사람. 팬텀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가득찼다. 뭘 행동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명령이 미처 떨어지기 전에, 가장 먼저 행동한 사람은 메르세데스였다. 그녀는 궁수답게 민첩함으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 

메르세데스가 비명처럼 외친 그의 진짜 이름에 그제서야 팬텀 또한 몸을 움직여 그에게로 달려갈 수 있었다.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은월을 살리기 위해 하나 남은 봉인석을 사용한 시그너스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너무 많은 양의 가스를 마셔버렸고 시간도 꽤 많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봉인석의 힘 때문일까. 다행히 목숨을 잃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명을 유지한 대신 자아를 대신 잃어야했다. 
겔리메르가 발명한 그 초록 가스는 마시면 영혼 없는 꼭두각시가 되는 독가스라고, 헬레나가 말했다. '꼭두각시' 라는 단어에 걸맞게 은월의 상태는 누가 봐도 안쓰러울만큼 심각했다. 2일의 혼수상태 끝에서 깨어난 그는 누가 와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은월의 상태를 지그문트에게서 듣고 직접 그를 만났을 때엔 팬텀은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나오려는걸 꾹 참고 처음 건넨 말은, 그 어떠한 말도 아닌 은월의 진짜 옛이름 한 단어였다. 
팬텀은 자신의 크리스탈가든에서 보살필거라고 했지만 지그문트는 2주동안만 에델슈타인에서 지내기를 권했다. 아직 발작도 일으키고 해독제를 만든다는 명분때문이었다. 또한 은월은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한다고 해서 그가 쓰던 물건을 가지고 와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라고 했다. 오늘 동료들이 은월의 집에 다녀온 것도 그 이유였다. 


"오늘 못와서 미안. 나 기다렸어?" 

"......." 

"그래도 다른 친구들 봤지? 에반 그녀석, 엄청 많이 컸어." 

팬텀은 조곤조곤 시끄럽지 않게 말해왔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에 은월이 눈을 느리게 금벅금벅 감는게 보였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 팬텀은 입술을 살짝 떨어뜨리고는 그의 체향을 맡았다.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이내 얼굴을 떼고 은월의 한쪽 손을 잡았다. 창백한 손이었지만 그대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힘없이 그대로 들어올려지는게 마음이 아파 팬텀은 은월의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 감쌌다. 꼭 잡고 있던 반대손을 가지고 그대로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책 위에 얹었다. 또한 자신의 손도 은월의 손 위에 살며시 얹어놓았다. 제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의 딱딱한 물체에, 은월은 잠시 움찔 하더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책으로 내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손이 반응하는게 느껴져 팬텀은 내심 기뻤다. 

"이 책 기억나? 난 사실 긴가민가 했는데 알고보니 그 책 맞더라. 기억나지?" 

"......." 

팬텀의 말에도 은월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책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달빛에 비친 책은 원래의 자색빛을 감춘 채 밝은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반짝반짝 거리며 표지에 장식되어져있는 쇠장식이 빛난다. 

"이거 말이야, 우리 한권 다 채우기로 했잖아. 아직 3분의 1도 안채워져있더라. 크큭.. 그렇게 열심히 적었는데 말이야." 

".........." 

수백년 전,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기 전 은월은 팬텀에게 책을 건넸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페이지의 책이었다. '우리 여기에 우리한테 있었던 일들을 다 적자. 일기형식으로 말이야. 다 적고 한권 채우고 나서 다시 보면 되게 재밌겠지?' 싱긋 예쁘게 웃으며 말하는 은월에게 팬텀은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면 더 좋은 일만 적힐거라고 말했다. 더 행복하고, 더 줄거운 일들로만 가득할거라고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됬나. 은월은 그 존재가 지워졌고 자신은 그런 은월을 기억하지 못했다. 팬텀은 이 책을, 자신의 보물창고에 저장해놓았던 걸 생각하고는 눈을 꾹 감았다. 책을 발견하고, 자신을 본 은월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예전에 적어놓은 글들을 볼 때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팬텀이 계속 조금씩 말을 걸어봐도 은월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팬텀 또한 기대를 하면 안되었지만 괜스리 기대를 걸어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은월의 손을 꼭 잡고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다시한번 은월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책을 펼쳤다. 

"몇개 읽어줄까? 너랑 나랑 번갈아가면서 쓴게 많아서 되게 재밌을거야." 

은월은 팬텀의 어깨에 기대있는 채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책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걸로 보아 긍정의 의미인 것 같았다. 은월의 무의식 안에서 이 책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큼! 크흠! 음... 어디보자, XX년 4월 12일." 
—이 기절했다. 나와 샌님이 밖에서 잠시 다툴 때 일어난 일이었다. 아란과 메르세데스의 음식을 먹은게 화근이었다. 프리드도 조금 속을 게워내는 걸 보니 둘이서 사이좋게 두 여자의 실험용 쥐가 된 듯 싶다. 그러길래, 내가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야 아무 음식이나 막 주워먹고. 그러면 안돼요 —씨~? 덕분에 나 한시간동안이나 꼬박 걱정했잖아. 

거짓말하지마 팬텀. 아란이랑 메르세데스가 주방으로 가자마자 너랑 루미너스랑 싸우는 척 나가는거봤어. 배신자! 

자신이 적은 일기 아래에 은월의 글씨체로 적혀있는 글은 그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어도 웃기다는 듯 키득키득거리며 웃어댔다. 팬텀은 살짝 은월의 표정을 살피고는 아직 듣고있는 걸 보고선 그를 좀 더 편하게 하도록 자세를 조금 고쳤다. 

"XX년 4월 21일. 날씨 따뜻." 
팬텀이랑 루미너스랑 싸우는 걸 말리느라 꽤 고생했다. 싸운 이유도 정말 어이없다. 팬텀이 루미너스를 샌님 대신 범생이라고 불렀다고 싸웠다. 얘네 둘은 왜 얼굴만 보면 싸우는걸까. 성격이 안맞는건 알겠는데 섞어놓으면 꽤 어울릴 것 같은데. 오늘따라 조금 크게 싸운 듯 싶어 틱틱대는 팬텀을 달래는 데에도 조금 힘들었다. 쳇. 뽀뽀 해주면 풀린다고? 팬텀 니 시커먼 속은 어딜가도 일등일거야. 

결국 해줬으면서. 


팬텀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자신이 아래에 달아놓은 글을 다시 한번 보았다.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은월은 손만 잡아도 엄청나게 부끄러워했다. 잠시 떠오른 옛 생각에 팬텀은 그리움이 사무쳤다. 

"XX년 10월 23일." 
모레는 검은 마법사와의 결전의 날이다. 오늘 아침 프리드와 나, —, 샌님, 아란과 메르세데스와 함께 마지막 작전을 짰다. 난 군단장들을, 특히 스우나 오르카를 막는 역할이다. 문득 든 아리아 생각에 조금 침울해진다. 잘 할 수 있을까 싶어 걱정되는데 —이 옆에서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날 보며 싱긋 웃어주는 그를 향해 나도 웃어보였다. 아, 난 살아야 한다. —을 위해서. 앞으로 있을 즐겁고 행복한 날들을 위해서. 

팬텀은 적힌 책장 중 가장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점점 떨려오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울컥 하고 또다시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손으로 입을 막고 울음을 삼켰다. 그라고 애써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비록 지금은 예전에 생각한 행복한 날은 아니지만." 

"......" 

"계속 적자. 어때? 내가 적을테니까. 괜찮지?" 

"......." 

그때였다. 
한줄기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에 은월의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팬텀의 곱슬머리도 흔들렸다. 바람에 은월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이유는 아마 자신의 옆에 그가 있기 때문일거라고 팬텀은 생각했다. 많이 흩날려 엉켜버린 은월의 긴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주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그의 머리를 손으로 고정시켰다. 얇지만 강한 바람에 팬텀의 손에 있던 책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몇장 넘어간다. 이윽고 바람이 멈추고 그가 책을 향해 시선을 내리자 책 중간페이지 정도에 어떤 글이 적혀있다. 떨리는 눈으로 글씨체를 보니 바로 그, 은월이었다. 팬텀은 두 손으로 책을 들고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OO년 5월 17일. 
여기쯤인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팬텀과 예전에 꽤 많이 적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어디까지 적었는지 잘 모르겠다. 역시나 예전에 나랑 팬텀이 적었던 글들은 다 지워지고 없어져있었다. 랑과 내가 나무에 새겼던 벗의 증표가 사라진 것처럼.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까. 너무 속상하고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싶다. 

OO년 5월 24일 
팬텀이 회의 중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차원을 한 번 넘은 상태라 보물창고 일은 기억나지 않겠지. 순간 긴장되고 떨려 많은 말을 하지 못했지만 가까이 본 것만으로도 만족할래. 더 능글맞아졌더라 팬텀. 

OO년 10월 27일 
내일 블랙헤븐 결전의 날이다. 떨린다. 하지만, 비록 그들은 날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다시 함께 싸우게 된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오늘은 달이 무척이나 밝다. 랑은 잘 지낼까 걱정이다. 호랑이한테 공격당하면 어떡하나. 얼른 일을 정리하면 구슬을 돌려주러 다녀와야지. 미우미우마을에 가면 팬텀은 또 날 잊겠지만 이젠 괜찮다. 내가 팬텀을 기억하니까. 팬텀은 기억 못하겠지만 수번 차원을 넘나들어서 이젠 조금 익숙해진 것 같다.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되는데...아, 내일 난 꽤 중요한 일을 맡는다. 부기님을 탈출시키고 난 이후부터 여제 시그너스는 날 많이 신뢰하는 듯 했고 아마 중요작전에 투입시키겠지. 언제 위험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내일 블랙헤븐 작전에서 나 어쩌면 안 좋은 일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팬텀이 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너무 그리워서. 그리고 너무 걱정되어서 잠이 오질 않아. 예전에도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기 전에 팬텀이 긴장했을 때 내가 어깨에 손 올려주었을 때처럼, 옆에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손 꼭..... 잡고..... 둘이서.... 예전처럼...." 

팬텀은 일기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토독 하고 책 표지에 눈물이 떨어진다. 눈에서도 하나 둘 떨어지던 눈물방울이 이젠 쉴새없이 흘러나와 볼을 흠뻑 적셨다. 은월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고이 곧대로 다 보여주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는 소리없이 입을 꾹 닫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내어 엉엉 울고싶었지만 팬텀은 그러는 대신에 입에 가득 차있는 울음을 꾹꾹 삼키면서 손으로 눈물을 닦는걸 선택했다. 
팬텀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은월을 품에 꼭 안았다. 그의 긴 머리에 얼굴을 묻으며 파고든다. 익숙한 바람냄새를 맡으며 팬텀은 또다시 조금씩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미안해 은월... 이말만을 중얼거린다. 그에 반응하듯 은월은 살짝씩 몸을 떨었다. 
어느샌가 은월 그는, 눈을 꼭 감고서 책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시간은 블랙헤븐 이후.
*플레이어는 은월이고 겔리메르의 독가스를 마시고 원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봉인석 힘때문에 은월 존재도 돌아왔단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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