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토독
물방울이 창문에 부딪혀 내는 음악에 은월은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그의 자안에 짙게 낀 먹구름과 함께 쏟아져내리는 비가 담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비올 날씨가 아니었는데. 작게 중얼거린 그는 창문을 계속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뭔가 아련한 기분이 들면서도 예뻤다. 비가 오는 탓에 유리 겉표면에 하얀 김이 서리는 걸 보고는 손가락을 들어 뽀독뽀독 닦아냈다.
은월은 읽고 있던 책 페이지 사이로 길쭉한 종이조각을 집어넣어 쪽수를 표시했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책을 덮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밖에 나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쐴 요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신전에서 할 일이라고는 책 읽는 것밖에 없어서 책을 쌓아두고 읽었지만 오늘은 비도 오는 겸 잠시만 밖에 나가 생각에 잠기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원래 생각하기를 좋아했었나 싶은 마음이 들어, 스스로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늘은 컴컴했다. 하늘이 아니더라도 주변에는 빛이 거의 없어 마치 늦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짙은 회색빛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햇빛은 하나도 들어오지 못했다. 아까 서재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지붕이 있는 계단에 앉아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아무도 없는 신전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조용해서, 지금 들리는 것이라곤 폭포소리같은 빗소리, 또 우르릉하고 이빨을 드러내보이는 천둥소리였다. 은월이 손을 밖을 향해 쭉 뻗는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려오던 빗물들이 손바닥에 내려오며 토독 하고 튀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탓에 그의 손이 금방 차갑게 식었다. 촉촉하고 시원한 빗물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그와 동시에 깊은 아림도 들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자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고 작게 미소지었다.
"꽤나 감성적이군."
헛. 예상치 못한 출현에 은월은 깜짝 놀라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긴 흑발에 차갑고 투명한 적안. 그리고 지금 빗방울인 마냥 차가운 분위기. 검은 마법사, 그였다. 검은 마법사는 저벅저벅 걸어오며 은월의 옆에 폭 하니 앉았다. 자세히 보니 그는 평소에 입던 긴 검은 로브가 아닌,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검은 티셔츠와 바지. 이 것이 전부였다. 꽤 오랫동안 신전에서 그를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옷을 입는 걸 보는 것은 은월 그로써도 처음이었다.
"무슨 용건이야."
은월이 무뚝뚝하게 말을 건넸다.
"내가 너에게 오는게 꼭 용건이 있어야하나?"
검은 마법사가 가볍게 되받아친다.
"하, 정말 당신은..."
"어이가 없다고?"
칫. 은월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그와 대화하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오묘하게 지는 느낌이었다. 은근 대들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검은 마법사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언젠가는 이기고 말리라는 알 수 없는 승부욕에 사로잡히게 했다. 뾰로퉁해진 은월이 무릎을 모으고 팔로 그러안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고 자신의 눈 앞에서 쏟아지는 비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그러자 검은 마법사가 낮게 웃으며 은월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은월은 살짝 그를 노려보았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 둘은 아무 말 없이 줄곧 앉아있었다. 검은 마법사나 은월이나 다 말수가 적은 타입이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인간관계를 그닥 폭넓게 가지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서로 이런 성향이 잘 맞아서인지 지금 계속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편하고,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가끔 검은 마법사가 머리를 쓰다듬는다던지, 가벼운 주제의 말을 건넨다던지의 행동은 있었지만 같이 비가 내리는 걸 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에도 이렇게나 비가 왔었지."
시간이 얼만큼 지났을까. 조금 추워진다 싶어 들어가려던 찰나, 은월이 검은 마법사에게 말을 건넸다.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에 검은 마법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날이라면, 분명 수백년 전 결전의 날을 의미하는 터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순간. 콰르릉 하며 빛이 번쩍 하더니 곧 이어 굉음같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소리에 놀랄 그들이 아니었다. 그 천둥번개 속에서도 검은 마법사는 은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꺼내는거지?"
"그냥. 생각났을 뿐이야."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은월 탓에 검은 마법사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닐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음은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그들을? 영웅들을?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여러 상황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은월이 연합쪽으로 가버리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검은 마법사는 저도 모르게 은월의 팔을 세게 잡았다. 그러자 은월이 탄성을 내뱉으며 검은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아....아파, 왜 이래!"
그러나 은월은 검은 마법사의 적안을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꼭 깨문 채 약간은 화난 듯한 표정. 그리고, 불안해하면서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소유욕. 그리고, 검은 마법사의 손의 떨림이 그대로 팔에 전해져왔다. 은월은 팔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마법사. 당신이 불안해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누누히 말하는데, 난..."
"...."
은월이 말을 하다 말고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또 손을 뻗어 빗물을 맞았다.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팔꿈치 쪽으로도 흘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비 맞는 걸 계속했다.
"당신과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말이지.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은월이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비가 오는 탓인가. 오늘따라 더욱 빛나 보인다. 조용하면서도 보일듯 말듯한 미소. 검은 마법사는 그런 은월의 미소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가, 배에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은월은 손을 거두어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낸 뒤 입고있던 옷에 살짝 닦아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가 그의 손을 잡고 아래로 당기는 바람에 도로 앉아버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뭐라 하기도 전에, 검은 마법사는 손을 들어 은월의 턱을 세게 지켜올렸다. 아픔을 호소하려 했지만, 순간 보이는 그의 강한 눈빛에 사로잡혀 은월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가끔 그런 눈빛을 보자면 살짝 무섭고 등 뒤에 오한이 서렸다. 하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은 마법사가 입을 맞춰왔다.
강한 눈빛과 대조되는 부드러운 입맞춤에 은월은 그저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검은 마법사의 긴 흑발을 손에 꼭 쥐고 만지작거리며 깊게, 더 깊게. 은월의 턱을 잡아올렸던 그의 손도 이젠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어느 샌가, 귀를 자극하던 세찬 빗줄기 소리가 점점 옅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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