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메이플(본진)&쿠로바스&오버워치&데스노트&유희왕 등
by 슈리0

NOTICE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 CLOUD

  • Total :
  • Today :  | Yesterday :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27)
쿠로바스 (1)
메이플스토리 (9)
오버워치 (0)
갓슈벨 (3)
데스노트 (1)
유희왕 (2)
(11)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8.06.17
    [메이플스토리/검마은월] 조각글
  2. 2017.06.02
    [메이플/검마은월] 조각글 3개
  3. 2017.06.02
    [메이플/은월른스터디/검마은월] 머리카락
  4. 2017.06.02
    [메이플/은월른스터디/검마은월] 비
  5. 2017.06.02
    [메이플/검마은월] 무제
  6. 2017.06.02
    [메이플/은월른스터디/검마은월] 붉음
  7. 2017.06.02
    [메이플/은월른스터디/팬텀은월] 보라색 책 5
  8. 2017.06.02
    [메이플/검마은월] 손
  9. 2017.06.02
    [메이플/논커플링] 편지
1.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게 느껴졌다. 마치 일어나라는 듯한 느낌에 검은 머리의 남자가 눈을 떴다. 뇌가 깨어나고 온 몸의 세포도 깨어나자 감각도 살아났다.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기 직전에 자신의 품 안에 안겨있는 다른 이가 느껴졌다. 누군지 알아차리자마자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정수리에 입술을 떨어뜨리며 작게 웃었다.
그를 안은 팔을 더욱 단단히 했다. 허리에 감은 팔을 단단히 하며 정수리에 얼굴을 부비자 상대도 잠에서 깨어나려 하는지 작게 몸을 뒤척였다. 검은 남자는 몸을 움직여 시선을 내렸고 곧 이어 품에 안겨있는 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듯 그가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검은 머리의 남자는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야옹

한쪽 귓가에 귀여운 울음소리가 타고 들어왔다. 남자는 고개를 조금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남자의 머리카락과 똑같이 검은, 작은 고양이였다. 3달 전, 은월이 길에 버려져있는 아이를 데려온 것이었다. 남자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가져다대어 쉿 이라는 짧은 숨소리를 내었다. 자고 있으니까. 그가 속삭이자 고양이는 알았다는 듯이 한번 기지개를 편 후 남자의 등에 딱 붙어 몸을 말았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너무나도 행복한 아침이었다. 남자는 은월의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을 내렸다. 오늘의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에 딸기잼을 발라먹어야지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2.
네가 사라졌다. 웃으면서 나를 보고는, 눈앞에서 소멸했다. 그런 널 보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따뜻한 온기만이 남아있는 곳을 보며 남자는 신음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는, 은월은 반드시 나 자신이 소멸해야 같이 소멸할 존재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 땅에 발을 딛고 폐를 이용해 숨을 쉬고 . 살아 있었다.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스히 잡고 있던 손이 느껴지는 듯, 날 보며 작게 미소짓는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연합이 패배하던 그 날, 너 또한 내 곁에서 떠나갔다. 좌절에 빠진 연합의 표정은 곧 이어 내 표정이 되었고 난 이 세상 위에 군림하는 신이 되었다. 내가 최고고, 모든 것들의 정상이고, 하등한 것들의 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의 재를 가지며 그날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어리석은 자일 뿐이었다.










오늘 은월 뉴짤 보고 뽕올라서 끄적거린거...
둘 다 진단메이커 보고 적은거에요!!!!!
And






1. 소파 위, 고양이, 통화음, 지팡이, 소풍. 

벨소리가 지겹게도 울렸다. 지금이 몇번째인지 모를만큼, 지치지도 않는지 쉴새없이 울려댔다. 벨소리가 끊어지면 5초도 안되어 다시 따르릉 거렸고 소파 위에 앉아있던 은월은 안절부절 못하며 애꿎은 고양이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일부러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기는 항상 있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고 문제는 그 다른 곳이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몇번 찾아봤으나 남는건 머리나 손에 남는 자잘한 상처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휴우, 몇년을 산 이 집 구조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해서야. 은월은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따르릉 거리던 전화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20번은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이만큼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기에, 전화를 건 당사자는 분명 여기로... 

띠.띠.띠.띠.띠. 

....왔구만. 

"야, 왜 이리 전화를 안받아!?" 

비밀번호를 누르고 나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다른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은월은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선배! 
남자는 은월을 향해 몇마디 더 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렸다가 그 옆에 지팡이가 없는 걸 보고서 눈을 찌푸렸다. 

"넌 지팡이를 또 어디다가 팔아먹은거야." 

"고의가 아닙니다. 전화 못받아서 죄송해요." 

됐어, 사과하지 마. 그는 짧게 툭 내뱉었다. 남자는 은월의 옆에 자리를 잡고 은월의 무릎에서 갸르릉 거리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소풍이나 가려 했더니. 지팡이 없이는 힘들잖아." 

에? 남자의 말에 놀란 그가 탄성을 내뱉었다. 다른 단어에 놀란게 아니고, '소풍' 이라는 말 때문에. 그에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어차피 은월에겐 보이지 않을 터였다. 

"아니요, 가요." 

"괜찮겠어?" 

그가 걱정스런 말투로 은월에게 말했다. 은월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세게 끄덕인다. 

"차피 선배가 옆에 있을텐데 지팡이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2.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이었다. 깊은 고동이 울려퍼졌다.] 


남자답지 않은 긴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그는 나무에 몸을 기댔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살랑거렸다. 고개를 위로 지켜들자 자신의 시야에 꽉 찰 만큼 나무는 크고 넓었다. 마구잡이로 날리는 머리카락이 꽤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딱히 저지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남자는 나무를 담던 눈을 돌려 아래로 내리꽂았다.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긴 머리를 소유한 남자였다. 은월. 그의 이름인 듯한 말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 마음에 대응해 준 사람은 바로 은월이었다. 그렇기에 별 일 없을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 은월 또한 자신과 마음이 같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자신과 함께 지내고 몸을 섞기 시작한 날부터 은월은 가면 갈수록 불안해하고 초조해했다. 눈물이 늘었고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자신의 앞에서는 아닌 척 밝게 웃지만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나름 유추해볼 수 있는 바로는, 잠꼬대를 할 때마다 그 옛날 용의 마법사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보아 그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미안함을 느끼거나. 아무튼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하지만 둘 중 어떤 이유든지 간에 마음이 불편한 건 변함이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은 많은 별 덕분에 완전한 검은색이 아닌, 짙은 남색과 보라색이 섞여있는 색이었다. 어디서든 완전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건가. 어둠이 있으면 그와 동시에 빛도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언젠가 은월이 슬쩍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다운 생각인 것 같아 괜스리 웃음이 나왔다.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내려 은월을 쳐다보았다. 문득 그의 보라색 자안에 별이 담기면 얼마나 예쁠까, 꼭 밤하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곤히 자고있는 그의 뺨에 손을 올려놓고 조심스레 쓸었다. 손가락을 통해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자신의 손길 때문인지 은월이 몸을 뒤척이며 기지개를 핀다. 눈을 살짝 뜨자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월은 다시금 눈을 감으며 남자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잘도 잔다. 그는 웃음기 담긴 얼굴로 말하며 얼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은월이 배시시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월의 미소에, 남자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게 느껴졌다. 밤이라서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는게 다행이었다. 만약 들켰다면 그는 일주일 내내 은월의 놀림이 될 게 뻔했으니까. 이유를 알 리 없는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남자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아아, 역시. 넌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소리없는 말의 고동이 깊게 울려퍼졌다. 




3. 멈춰버린 시간/샴페인/조금만 더 
*아주 약간의 수위 조심해주세요 


샴페인인데도 불구하고, 은월은 정신없는 머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분명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샴페인은 그다지 도수가 높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고작 3잔 마시고 이 모양이라니! 열이 올라 붉어졌을 얼굴을 손으로 감싸 식히면서,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욱. 골이 흔들리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흔든건 큰 실수였다. 

"괜찮아?" 

은월의 앞에 앉아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있던 다른 남자가 물어왔다. 이 남자는 취하지도 않나. 은월은 자신만 이런게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앞에서는 굴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줘요." 

"무리하면 안될텐데." 

"상관 없으니까, 조금만 더." 







젠자아앙!!! 은월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신을 원망했다. 저 남자에게는 외모, 재력, 권력, 능력까지 다 줘놓고서 정작 저에게는 주량마저 주지 않은겁니까!?!? 

"더러운 세상..." 

애꿎은 세상탓만 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가가 당기고 시야가 어질어질한게 딱 취기가 올라오는 증상이다. 하... 서럽다. 은월은 빨리 씻고 자고싶은 생각 뿐이었다. 
남자가 샴페인이 든 잔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왔다. 모처럼 네 승진 축하파틴데 벌써 끝나면 아쉽잖아. 취기도 안오르는건지 여유있는 표정을 지으며 한 모금 들이키는 모습이 어찌나 섹시한지, 은월은 정신 없는 그 와중에도 그의 모습을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술 때문인지 얼굴에 열도 빨리 달아오르는 듯 했다. 그런 얼굴을 보여주긴 싫어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뭘 고갤 돌려? 나 봐." 

"싫은데요." 

"어쭈?" 

이게 상사의 말을 거부해? 남자는 낮게 웃으며 샴페인이 든 잔을 들고 은월의 옆에 착석했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한 모금 가볍게 머금은 뒤, 은월의 고개를 손으로 돌려 그대로 입맞췄다. 

은월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입을 통해 들어오는 톡 쏘는 샴페인 맛에 가뜩이나 달아올랐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달작지근하면서도 톡 튀는 샴페인 맛과, 곧 이어 맞물리는 말캉한 살덩어리가 정신을 더 어지럽게 헤집었다. 농도 짙은 입맞춤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은월은 입을 떼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한 손으로 은월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키스하고 싶어.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는 싱긋 웃으며 입맞췄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And







'.....프리드, 이제 그만 놓지..?' 

'하지만 꽤나 감촉이 좋다고.' 

'난 잘 모르겠는데.' 

'손질을 안하니까 그렇잖아. 네 머리, 마치 나무를 보는 것 같아. 색이 너무 예뻐.' 

'나무가 뭐야 나무가........자르려 했는데.' 

'뭐??? 안돼, 절대 자르지 마. 절대로!' 


헛. 
은월이 숨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 몸은 땀범벅이었다. 땀으로 인해 축축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떼어냈다. 손에 착착 감기는 긴 머리를 보면서 아까 꾸었던 꿈을 다시 상기시켰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꾸는 그의 꿈에 마음속에서 슬며시 아련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돌아선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그가 생각날 때마다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언가 뾰족한 것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거두어주고 이름까지 준 프리드는 은월에게 있어서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등지고 다른 이에게, 그것도 그 다른이가 프리드가 평생을 바쳐 봉인하려 했던 남자라는 사실은 항상 목을 옥죄어왔다. 이불에 땀범벅이 된 얼굴을 파묻으며 시원한 감촉을 느꼈다. 주먹을 꼭 쥐자 반듯했던 이불에 주름이 지며 구깃해졌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긴 머리를 쓸어내리다가 이내 꽉 잡았다. 머리가 당겨지는 고통이 따랐지만 그것을 신경쓸 겨를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은월." 

다음날 정신없이 할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은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언제나 그렇듯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그가 서있었다. 새까만 로브에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 깨끗한 붉은 눈동자까지. 
검은 마법사. 은월이 작게 웃으며 그의 호칭을 불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망설임없이 은월을 꼭 안았다. 은월 자신이 작은 키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보다 얼굴 하나는 더 컸다.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그대로 몸을 늘어뜨리니 그가 허리를 단단히 감고 지탱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얹히는 것도. 수고했다, 이제 좀 쉬어. 부드러운 목소리에 은월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수마에 잠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계속 아른거리는 프리드의 얼굴에 계속 내려가려는 눈커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그건 생각보다 꽤 힘들었다. 

"억지로 깨지 않아도 된다. 피곤하면 들어가." 

"알고 있어. 하지만..." 

다시 꿈에 나올 것 같아. 은월은 뒷말을 삼키고서 검은 마법사의 옷깃을 꽈악 쥐었다. 은월? 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아른거리는 얼굴을 애써 밀어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울고있었다. 바닥에 쪼그려앉아서 붉은 로브의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작게 울고있었다. 온통 새하얀 방에서, 아니 공간에서 그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조심스레 다가가 앞에 마주보며 앉았다. 그러자마자 그가 고개를 들고, 그의 깨끗한 벽안과 자신의 자안이 쨍하고 마주쳤다. 

'어째서 그런거야, —?' 

순식간에 새하얬던 공간이 붉게 물들어간다. 

'어째서 날 배신한거야?' 

'아니, 아니야 프리드. 난....!'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몸이 파들파들 떨리며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두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려고 필사적이었다. 프리드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난 그에게 갔을까? 아니면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까. 어쩌면 지금은, 프리드의 대용으로 검은 마법사를 선택한 걸지도 몰랐다. 프리드의 꿈만으로도 크게 동요하는 행동이 그 증거였다. 또한 프리드가 좋아했던, 이 긴 고동색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은월은 저 스스로가 무척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벌컥 하고 방문이 열리는게 들렸다. 자신의 비명소리를 들은건지 문 앞에는 검은 마법사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해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이젠 프리드 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려다 은월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흠칫 하며 몸을 멈추는게 보였다. 걱정 끼치고 싶진 않은데. 은월은 이렇게 생각하며 얼른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 

은월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다가와 은월의 옆에 앉고서 두팔 가득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여주며 마치 아기 달래듯 앞뒤로 왔다갔다 거리자 이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거리던 몸이 멈췄다. 

"......몇시야?" 

"다섯 시." 

"..........아침까지 있어줘." 

"네가 원한다면." 

짧은 대화지만 은월은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프리드와는 다른,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지는게 느껴졌고 온 몸이 진정됐다. 검은 마법사는 좀 더 은월을 세게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은월은, 저를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내던 프리드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품을 파고들었다. 어째서 날 배신한거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웽웽거렸다.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부정의 말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프리드의 얼굴은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눈만 감았다 하면 그의 표정이 떠오르는 통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툭 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리워서, 보고싶어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 흐르는 눈물이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막고 스스로를 달래며 다독여봐도 이미 크게 흔들린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검은 마법사가 모를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지."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옆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마침 꿈에 나온 프리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여서 뜨끔하고 몸이 흠칫거렸다. 하지만 은월은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한 적안을 보고 거짓말 할 용기는 없었다. 아예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게 더욱 기폭제가 된건지 검은 마법사가 목소리를 깔며 다시 말한다. 내 눈 보며 말해. 
은월이 눈을 살며시 떠 검은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적안을 가까스레 쳐다보며 모기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됐어." 

그가 은월에게 짧게 입맞추며 말했다. 아직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적어도 차가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그대로 기대자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 

"......." 

조용한 침묵이 방 안에 가라앉았다.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이따금 손가락을 이용해 빗어내렸다. 곱슬기가 전혀 없는 은월의 머리는 엉킴 없이 부드럽게 빗어졌고 그걸 검은 마법사는 여러 번 반복했다. 은월은 그의 행동이 마치 예전에 프리드가 자주 해주었던 행동같아서, 그래서 프리드가 투영되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차마 하지말라고 뿌리칠 수 없어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 뿐이었다. 코를 향해 들어오는 검은 마법사의 체향을 맡으며 애써 프리드가 아니야— 라고 상기시켰다. 

"검은 마법사." 

조금 뒤 은월이 입을 열었다. 

"......머리 자를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인지 그가 뭐? 하고 반문하는게 들렸다. 쓰다듬어주던 손도 그대로 멈췄다. 머리 자를까 싶어서. 다시한번 말했다. 

"자르기엔 조금 아깝군." 

그가 은월의 긴 머리를 조금 잡고 아래로 쓸어내리며 말한다.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떨어뜨렸다.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몇번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다시 은월의 등 뒤로 넘겨주었다. 

"하지만 네가 자르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그의 최종적인 대답이 들렸다. 

"그래...?" 

".......꼭 나무같아. 머리색이 정말 예쁘군." 

은월이 화들짝 놀라며 기대었던 얼굴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듣자 가슴에 돌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투영되어 보이던 프리드의 모습은 어느샌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어두운 자안은 검은 마법사, 그 자체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은월이 아니었다. 그런거야, 그런거였어. 스스로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하하 하고 실없는 웃음을 자아냈다. 은월의 갑작스런 행동에 순간 놀란 그가 '왜 그래?'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입을 열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은월은, 그에게 작게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다시 기댔다. 


오늘은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내고 있지도 않았다. 프리드는 항상 보여주었던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 걸맞게 조용히 말하고는 사라졌다. 선택은 네 몫이야. 

아직 쌀쌀한 공기가 도는 새벽. 은월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가 꿈에 나오면서부터 처음 맞이하는 조용한 아침이었다. 선택은 네 몫이야, 라는 말이 아직 귓가에 생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옆에 검은 마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고서. 아마 늦게까지 연구를 하다가 정신없이 잠든 것 처럼 보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덮던 이불을 조심스레 덮어주고 턱 밑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고 겨우 잠든 듯한 그가 깨지않도록 조용히 빠져나왔다. 

신전 밖으로 나와서 동 트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새벽빛을 붉은 태양빛이 점점 물들이는 것을 보며 은월은 쓴 웃음을 지었다. 프리드를 딱 한번. 딱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가볍게 하는 대화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긴 머리카락이 거꾸로 부는 바람 탓에 앞으로 휘날렸다. 거슬릴 법도 하건만 왜인지 그는 가만히 서있었다. 마치 굳은 결심을 한 것 처럼 그렇게 강한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월이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고정시키고 뒤로 하여 한 손으로 잡았다. 남자치고 많은 머리숱이 그대로 느껴지며, 새삼스레 자신이 아주 어릴때부터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냈다. 몇년을 자란걸까, 이 머리는. 마지막으로 손질하던 때를 기억하려 애썼지만 그러기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무리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프리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안. 미안해, 프리드. 영원히 닿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그대로, 너클을 이용하여 긴 머리를 서걱 잘라냈다. 

이십 몇년동안 자신의 신체일부였던 머리카락이 그대로 떨어져나갔다. 계속 불어오던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그는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허전하면서도, 개운함이 동시에 밀려들어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기고,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원래라면 계속되어야 할 빗질이 목 부근에서 끊기자 약간은 서운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으리라고, 그리고 후회해서도 안된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는 느낌에 은월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길고 칠흑처럼 검은 그의 머리카락이 자신을 향해 살랑거리는게 보였다. 검은 마법사, 그는 작게 웃으며 은월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은월이 어색한 듯 머리를 계속 손으로 쓸어내리자 검은 마법사의 눈이 예쁘게 휘며 눈웃음을 그렸다. 그리고 

"잘 어울려." 

라고 나즈막히 속삭이며 머리카락 위에 짧은 입맞춤을 여러번 떨어뜨렸다. 그 감촉이 좋아 은월은 기분좋은 웃음을 그려냈다. 

"조금 삐뚤한데..." 

"나중에 다시 손질하면 돼." 

그리고 그렇게 비뚤하진 않아. 검은 마법사가 속삭이며 낮게 웃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그와 짧게 입맞추며,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을 맡겼다. 

은월은 계속 그에게 안긴 채로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단단히 감은 팔에 손을 올려놓으며 어딘가로 계속 날아가고 있을 머리카락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사람 사는 곳에 떨어지면 그 사람들 무서워 할텐데. 지붕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차라리 바다에 떨어져 파도가 숨겨주었으면. 넓디 넓은 숲에 떨어지는 것도 낫겠다.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자신의 긴 머리를 아껴주고 좋아하던 그의 얼굴도 떠올랐다. 여전히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아렸지만 이젠 바뀌어야했다. 은월은 눈을 감고, 항상 저를 향해 웃어주던 프리드를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지워냈다. 안녕. 들리지 않을, 닿지 않을 말을 그에게 마음속으로 건넸다. 
And







톡 
토독 

물방울이 창문에 부딪혀 내는 음악에 은월은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그의 자안에 짙게 낀 먹구름과 함께 쏟아져내리는 비가 담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비올 날씨가 아니었는데. 작게 중얼거린 그는 창문을 계속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뭔가 아련한 기분이 들면서도 예뻤다. 비가 오는 탓에 유리 겉표면에 하얀 김이 서리는 걸 보고는 손가락을 들어 뽀독뽀독 닦아냈다. 
은월은 읽고 있던 책 페이지 사이로 길쭉한 종이조각을 집어넣어 쪽수를 표시했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책을 덮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밖에 나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쐴 요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신전에서 할 일이라고는 책 읽는 것밖에 없어서 책을 쌓아두고 읽었지만 오늘은 비도 오는 겸 잠시만 밖에 나가 생각에 잠기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원래 생각하기를 좋아했었나 싶은 마음이 들어, 스스로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늘은 컴컴했다. 하늘이 아니더라도 주변에는 빛이 거의 없어 마치 늦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짙은 회색빛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햇빛은 하나도 들어오지 못했다. 아까 서재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지붕이 있는 계단에 앉아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아무도 없는 신전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조용해서, 지금 들리는 것이라곤 폭포소리같은 빗소리, 또 우르릉하고 이빨을 드러내보이는 천둥소리였다. 은월이 손을 밖을 향해 쭉 뻗는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려오던 빗물들이 손바닥에 내려오며 토독 하고 튀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탓에 그의 손이 금방 차갑게 식었다. 촉촉하고 시원한 빗물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그와 동시에 깊은 아림도 들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자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고 작게 미소지었다. 

"꽤나 감성적이군." 

헛. 예상치 못한 출현에 은월은 깜짝 놀라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긴 흑발에 차갑고 투명한 적안. 그리고 지금 빗방울인 마냥 차가운 분위기. 검은 마법사, 그였다. 검은 마법사는 저벅저벅 걸어오며 은월의 옆에 폭 하니 앉았다. 자세히 보니 그는 평소에 입던 긴 검은 로브가 아닌,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검은 티셔츠와 바지. 이 것이 전부였다. 꽤 오랫동안 신전에서 그를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옷을 입는 걸 보는 것은 은월 그로써도 처음이었다. 

"무슨 용건이야." 

은월이 무뚝뚝하게 말을 건넸다. 

"내가 너에게 오는게 꼭 용건이 있어야하나?" 

검은 마법사가 가볍게 되받아친다. 

"하, 정말 당신은..." 

"어이가 없다고?" 

칫. 은월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그와 대화하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오묘하게 지는 느낌이었다. 은근 대들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검은 마법사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언젠가는 이기고 말리라는 알 수 없는 승부욕에 사로잡히게 했다. 뾰로퉁해진 은월이 무릎을 모으고 팔로 그러안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고 자신의 눈 앞에서 쏟아지는 비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그러자 검은 마법사가 낮게 웃으며 은월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은월은 살짝 그를 노려보았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 둘은 아무 말 없이 줄곧 앉아있었다. 검은 마법사나 은월이나 다 말수가 적은 타입이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인간관계를 그닥 폭넓게 가지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서로 이런 성향이 잘 맞아서인지 지금 계속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편하고,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가끔 검은 마법사가 머리를 쓰다듬는다던지, 가벼운 주제의 말을 건넨다던지의 행동은 있었지만 같이 비가 내리는 걸 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에도 이렇게나 비가 왔었지." 

시간이 얼만큼 지났을까. 조금 추워진다 싶어 들어가려던 찰나, 은월이 검은 마법사에게 말을 건넸다.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에 검은 마법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날이라면, 분명 수백년 전 결전의 날을 의미하는 터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순간. 콰르릉 하며 빛이 번쩍 하더니 곧 이어 굉음같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소리에 놀랄 그들이 아니었다. 그 천둥번개 속에서도 검은 마법사는 은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꺼내는거지?" 

"그냥. 생각났을 뿐이야."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은월 탓에 검은 마법사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닐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음은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그들을? 영웅들을?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여러 상황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은월이 연합쪽으로 가버리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검은 마법사는 저도 모르게 은월의 팔을 세게 잡았다. 그러자 은월이 탄성을 내뱉으며 검은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아....아파, 왜 이래!" 

그러나 은월은 검은 마법사의 적안을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꼭 깨문 채 약간은 화난 듯한 표정. 그리고, 불안해하면서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소유욕. 그리고, 검은 마법사의 손의 떨림이 그대로 팔에 전해져왔다. 은월은 팔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마법사. 당신이 불안해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누누히 말하는데, 난..." 

"...." 

은월이 말을 하다 말고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또 손을 뻗어 빗물을 맞았다.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팔꿈치 쪽으로도 흘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비 맞는 걸 계속했다. 

"당신과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말이지.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은월이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비가 오는 탓인가. 오늘따라 더욱 빛나 보인다. 조용하면서도 보일듯 말듯한 미소. 검은 마법사는 그런 은월의 미소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가, 배에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은월은 손을 거두어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낸 뒤 입고있던 옷에 살짝 닦아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가 그의 손을 잡고 아래로 당기는 바람에 도로 앉아버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뭐라 하기도 전에, 검은 마법사는 손을 들어 은월의 턱을 세게 지켜올렸다. 아픔을 호소하려 했지만, 순간 보이는 그의 강한 눈빛에 사로잡혀 은월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가끔 그런 눈빛을 보자면 살짝 무섭고 등 뒤에 오한이 서렸다. 하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은 마법사가 입을 맞춰왔다. 
강한 눈빛과 대조되는 부드러운 입맞춤에 은월은 그저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검은 마법사의 긴 흑발을 손에 꼭 쥐고 만지작거리며 깊게, 더 깊게. 은월의 턱을 잡아올렸던 그의 손도 이젠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어느 샌가, 귀를 자극하던 세찬 빗줄기 소리가 점점 옅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And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할 것만 같았던 방이,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위기를 바꾼 장본인은 검은 마법사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있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거친 숨을 골라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침대 이불을 꼭 쥐고 있었다. 어찌나 꽉 쥐고 있었던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그래도 하얀 피부가 핏기가 없어지면서 더 하얘져 아예 창백해졌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창문 사이로 옅게 흩뿌려지는 푸른 새벽빛에 붉은 가넷색 눈동자가 반짝인다. 하지만 언제나 차갑고 곧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없고 오히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눈이 자리잡고 있었다. 옆에 다른 누군가가 깨어있었다면 그 주인공이 제 아무리 잔혹하고 냉정한 검은 마법사라고 해도 걱정했을만큼. 

검은 마법사는 무릎을 모아 가슴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 심호흡을 하듯 깊게 숨을 들이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이 덜덜 떨리고 손도 떨리는 것이, 아무래도 진정하기에는 힘들어보였다. 두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하고서 다시 한번 진정하려는 듯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그래도 진정이 되질 않자 결국 두 손으로 눈을 감싸고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그는 자세를 풀고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사람은 아직 자고 있는 듯 약간 입을 벌리고 고른 숨을 뱉어내고 있었고 이불의 감촉이 좋은건지 아니면 지금 꾸고 있는 꿈이 좋은건지 이따금 잠꼬대를 하며 미소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자 검은 마법사도 저도 모르게 따라서 미소지었다. 그는 남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해주며 이리저리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는 남자의 뺨에 손을 올려놓는다. 손을 향해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는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덜덜 떨리던 손이 잠잠해지고 흔들리던 눈빛이 점차 평안해졌다. 검은 마법사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여 정수리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은월."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입안에 담아본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부드러웠고 또한 나지막했다. 한번 부르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계속해서 불렀다. 은월. 은월. 
아주 작게,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빠져나왔는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는 몸을 잠시 뒤척이다가 눈커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원래라면 보랏빛으로 빛났어야 할 눈동자가 어둠과 새벽빛에 묻혀 까맣게 보였다. 

"미안하다.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니 괜찮아. 그럼 미안하지만 조금 더 눈 붙여도 될까." 

"물론. 때가 되면 깨워줄테니." 

싱긋. 부드러운 말투에 은월이 살짝 미소지었다. 검은 마법사는 몸을 움직여 그의 옆에 눕고선 그를 살짝 끌어당겨 안았다. 은월 또한 검은 마법사에게 더 몸을 가까이 하면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머리 위에 입술을 여러번 떨어뜨리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리듬있는 손짓에 기분이 나른해져 그는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순간 검은 마법사의 눈에 이채가 돌았지만 은월은 깨닫지 못했다. 



은월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검은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3일째. 3일째 검은 마법사 그는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주변인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주변인이라고 해봤자 군단장들 뿐이었지만. 평소에 충성심 빼면 시체라고 해도 될만큼의 그들조차 검은 마법사의 행동에 지치는 기색을 보일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는 눈에 띄게 예민해지고 쉽게 신경질을 부렸다. 그리고 자주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가만히 앉아만 있는 때도 있었고 자는 도중에도 몇번이고 중간에 깼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 공격마법을 시전하는 통에 신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닐 정도였다. 평소의 그와는 확연히 다른 행동들이었다. 군단장들이 은월에게 부탁을 하면서까지 이유를 캐내려고 하였지만 은월이 이유를 물어봐도 되돌아오는 건 그저 꼬옥 안아오는 품, 그 뿐이었다. 

은월이 검은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은 마법사가 읽고 있던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종이에 적힌 글을 제대로 읽을수가 없었다. 검은 마법사가 종이를 거꾸로 들고 있었던 탓이었다. 하... 은월이 작게 한숨쉰다. 점점 조금씩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그는 검은 마법사가 읽던 그 종이를 홱 하니 낚아챘다. 

"무슨 짓이지?" 

잠짓 엄한 얼굴로 은월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차피 안읽고 있는 거 다 알아. 종이 거꾸로 든 주제에 읽고 있는 척 하지마."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검은 마법사는 속으로 흠칫했다. 게다가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이 그토록 정신 없었나 싶기도 했다. 은월은 또다시 한숨을 쉬고 검은 마법사에게 말했다. 

"검은 마법사. 요즘 당신 이상해. 알아?" 

"하도 많이 들어서 알아." 

"알면서 왜 그래? 대체 이유가 뭐야?" 

은월이 조금은 짜증을 담아 검은 마법사에게 쏘아붙였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그이지만, 하도 답답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화를 낸 것이었다. 검은 마법사가 은월을 올려다보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터라 자연스레 시선은 위로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하게도 평소와는 너무나 달라서 은월은 그만 그 시선을 피했다. 빨리 대답해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시선을 도로 책상 위로 내리꽂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묘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깬 사람은 은월이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자신이 빼앗은 종이를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그리고 여전히 말 없는 검은 마법사를 노려보며 툴툴거렸다. 

"됐다. 말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돼. 억지로 강요하진 않을테니." 

그럼 나 먼저 나간다. 은월이 이 말을 하며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몸이 무거운 것이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었다. 가끔은 의지하고 기대도 좋을텐데 혼자서 다 해결하려는 게 여간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물어봐야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는 몇발자국 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야했다. 검은 마법사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놔주지 않은 탓이었다. 휙 하고 검은 마법사가 손을 자신 쪽으로 당긴다. 갑작스런 힘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며 그대로 끌려간 은월은 덥썩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버렸다. 놀람과 부끄러움이 섞여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ㅁ...뭐하는거지? 이거 놔." 

"....." 

당황하여 어버버 거리며 빠져나오려 해도 단단히 감은 팔에서 나가기란 경험 상 불가능이었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해적계열이라 힘은 왠만큼 자신있는 은월조차 당하지 못했다. 그는 몇번 저항하다 몸을 비트는 걸 포기하고 가만히 안겨 그의 체온을 느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머리 곳곳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은월."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이 하나하나 소중한 일상이 마치 얼마 가지않아 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은월은 저도 모르게 검은 마법사를 마주안았다. 

검은 마법사는 은월을 안고 있는 도중에도 계속 떠오르는 장면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이런 적은 많다. 수백년 전 륀느의 힘을 빼앗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겪었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는 힘. 그 미래는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때도 있지만 제일 많이 나타나는 형태는 꿈이었다. 가까운 미래부터 먼 훗날까지 범위는 다양했으며 게다가 자신이 연루되지 않는 상황이면 바꿀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달라도 정말 끔찍한 방향으로 달랐다. 

"은월."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팔을 더 단단히 했다. 은월 또한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대었다. 영원했으면 좋겠어. 검은 마법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계속 신경쓰이게도 마음속의 응어리가 터질듯 말듯 아릿거렸다. 
이번에는 꿈에서 은월이 나왔다. 항상 자신의 곁에서 지켜주는 그런 듬직한 모습으로. 하지만 미래에서 그가 보인다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은월, 그는 자신을 향해 밝게 웃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웃음과는 반대되는 상황이 더 뚜렷했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 밖에 없는 주변의 소음. 마법명을 부르며 시전하는 마법사들과 이리저리 쏘아지는 화살의 바람소리. 둔탁한 소리를 내며 꽂히는 검. 그리고...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 보이자마자 반사적으로 꼭 껴안는 은월의 온기까지. 꿈의 끝은 그런 그가 무너지는 것에서 끝이 났다. 


"아아... 은월." 

다시 한번 그 장면이 상기되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가 쳐졌다. 기분같아서는 왠지 모든 걸 내려놓고 펑펑 울고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월은 그저 꼭 안은 채 등을 쓸어줄 뿐이었다. 
은월이라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 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물어볼 분위기도 아닌 것 같았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원래 검은 마법사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채, 마치 감정을 조절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그대로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은월에게 오히려 더 큰 걱정과 염려를 끼쳤다. 어째서 같이 짊어질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 앓는지 은월의 입장에서는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당신,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 

"혼자서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은월의 나즈막한 말에 검은 마법사는 가슴 안에 돌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은월을 두르던 팔에 힘을 빼고, 대신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심금을 울리는 듯한 말 한마디에 가슴속의 응어리가 요동친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 심하게. 본능적으로 그것이 터져버리는게 두려워 일부러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을 감았다. 평생 자신은 겪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감정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또한 떨리기도 했다. 한동안 감정을 억누르다가 검은 마법사는 눈을 뜨고 일부러 작게 웃으며 은월의 뺨을 쓰다듬었다. 은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약간은 원망스러운지 조금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피 하루이틀 지나면 풀릴 터였다. 


검은 마법사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더욱 이상한 증세를 보였다. 은월이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극도로 불안해했고 전보다 더 예민해졌다. 잠을 자면 꿈에 항상 그 장면이 나와버리는 바람에 아예 밤을 새는 날도 잦아졌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검은 마법사가 어느 날부턴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은월은 몇일 동안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원래 검은 마법사는 자신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는 스타일이었고 더군다나 곧 결전의 날이다. 그를 훼방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다가 곧 있으면 나올거라 생각했다. 좀 더 결계를 굳게 하고 더 강한 마법을 연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을 땐 시간이 꽤 지난 날이었다. 우연히 연구실 쪽을 지나가다가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남성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 목소리는 바로 검은 마법사, 그의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은월이 뛰어가 살펴보니 연구실 안은 엉망진창이었고 그 넓은 방 한 가운데에서 검은 마법사는 거친 숨을 몰아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찢긴 종이조각, 유리 파편.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은월은 섵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검은 마법사는 연구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장면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뚜렷해졌다. 곧 다가올 미래라는 듯이. 그렇게 은월의 죽음은 올가미처럼 점점 자신을 세게 조여왔다. 막아야한다. 막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막고 싶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것이 시간의 초월자의 숙명. 그렇기에 륀느 그녀도 봉인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 연두색의 긴 화살은 어찌 되었든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이 분명했고 그 화살을 그냥 두고 볼 은월이 아니었다. 검은 마법사는 과거에 자신의 숙명을 바꿀 수 없었던 륀느를 비웃었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본 륀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과 같이 절망했을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검은 마법사는 당시 그녀를 봉인할 때의 일을 잠시나마 회상하며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 물어뜯지 마." 

어느 새 은월이 다가와 그의 손을 살짝 내리쳤다. 방금 씻고 나온 참인지 항상 입던 검은 옷이 아닌 통이 큰 하얀 가운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며 털어낸다. 덜 마른 그의 고동색 머리는 비단결마냥 곱고 부드러워 보였다. 검은 마법사는 순간 은월의 머리카락을 만지려던 손을 자각하고 재빨리 내렸다. 

"당신 요새 왜 그래? 결전의 날 때문이야? 그래서 그렇게 불안해 하고 있는건가?" 

은월이 검은 마법사를 향해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어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에 검은 마법사는 쓰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런걸지도." 

"당신답지 않군." 

그런가. 검은 마법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사락 하며 그가 앉은 시트에 깊은 주름이 진다. 그러자 무척이나 긴 흑발이 목과 등을 지나고도 남아 하얀 침대시트에 펼쳐졌다. 흑과 백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인 양 무척 잘 어울린다고, 순간 검은 마법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월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계속해서 닦으며 옆에 가 앉았다. 그가 가까이 오자 깨끗한 물내음과 함께 인위적인 향이 물씬 풍긴다. 검은 마법사보다는 짧지만 그래도 길고 예쁜 고동색 머리를 계속해서 수건으로 비볐다. 샤워 직후라 그럴까. 평소보다 더 끌리는 모습에 검은 마법사는 빤히 은월을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려 '할 말 있어?' 라는 눈빛을 보냈다. 

"은월." 

"왜 불러." 

"냉정하군. 가끔은 부드럽게 대답해줘도 좋잖아." 

"하... 닥쳐. 정말 어이가 없군 그래." 

은월이 짜증을 내며 검은 마법사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눈빛에 겁 먹을 그가 아니다. 오히려 웃음으로 되받아치고는 부드럽게 품에 그러안았다. 자신의 품 안에 가만히 남아있는 온기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해서, 마치 깨어질 듯 아슬아슬 한 것만 같아 유리 가공품 만지듯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그러자 그의 손에, 머리카락에 남아있던 물기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항상 그에게 받는 애정표현이자 스킨십이었지만 은월은 왠지 모를 다른 분위기 탓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불쾌함이나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검은 마법사가 피부를 닿아오고, 자신에게 해주는 표현들을 은월은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은월." 

아직 자신의 그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은월에게 검은 마법사가 말해왔다. 

".......왜." 

"시간을, 멈출 수 있었으면 좋겠어." 

"....."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안겨 검은 마법사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저 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진지했다. 뒷말을 더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검은 마법사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놓지 않겠다는 듯이 세게 꼭 끌어안았다. 좀 더 오랫동안 온기를 느끼고 싶었고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고 더 오랫동안 옆에 있고 싶었다. 그저 그것 뿐인데 터무니없이 사소한 일상과 행복마저 빼앗아가려는 운명이 너무나도 악되고 원망스러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검은 마법사는 품에서 은월을 살짝 떨어뜨린 뒤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몸이 이끌리는대로 그렇게 조금씩 그를 탐했다. 살짝 밀치려던 은월의 하얀 손도 어느 새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입맞춤은 점차 짙어졌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나는 바닷물처럼 더욱 갈급하다는 듯 격렬히 원했다. 좀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생각과 어느 샌가 어디로 홀연히 가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도 생겨 조급함이 더해진 것 같기도 하다. 부드럽게 침대 위로 쓰러뜨려 은월의 몸 위에 올라 키스를 하며 검은 마법사는 그의 목, 뺨, 쇄골 부근에도 입술을 떨어뜨렸다. 옷 아래로 손을 넣어 허리를 지분거리며 살짝 고개를 들어 은월을 내려다보았다. 입맞춤의 잔재가 남아있는 탓일까. 붉게 상기되어있는 그의 얼굴이, 취침조명빛을 받아 더욱 붉어보였다. 자신을 향한 자안을 보며 검은 마법사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마음속에 엉켜있는 어떤 무언가가 계속 터지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도 계속 받아왔던 그런 이상한 감정에 검은 마법사는 거부감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이대로 온 몸을 맡기고 싶단 생각에 이르렀다. 

어...? 
은월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눈을 크게 떴다. 차가운 것이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손을 움직여 자신의 눈 언저리를 만져보았다. 그러자 손가락에 분명히 묻어나오는 물기. 검은 마법사 또한 놀랐는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떠보였다. 그 탓에, 또다시 은월은 자신의 뺨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여러개 느껴버리고 말았다. 

"거..검은 마법사...?" 

"아..." 

그가 검은 마법사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느릿느릿 조심스레 움직여 부드럽게 얼굴을 감쌌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은월이 떨리는 손으로 검은 마법사의 눈가를 쓸었다. 

"....왜 그래...." 

"은월.... 나... 은월...." 

그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눈을 감고 몸을 움직여 은월을 꼬옥 안았다. 그 바람에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가 은월에게 쏟아졌다.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목에 얼굴을 묻고 체향을 맡으며 눈에서 떨어지는 이질적인 느낌을 계속해서 느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점차 많아져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울음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저도 모르게 그만 엉엉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려버린다. 어린 아이처럼 매달린 채 가슴 속의 모든 응어리를 풀어내려는 듯. 검은 마법사는 은월의 허리를 감싼 채 계속해서 어깨를 떨었고 은월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면서도 그를 토닥이기에 바빴다. 

"미안...미안해 은월... 미안해...연구가....시간의 힘 때문에....하지 말걸... 연두색이..." 

"진정해, 검은 마법사. 쉬이... 쉬...." 

너무 큰 감정 탓일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않는 말을 늘어놓는 검은 마법사를 은월이 조용히 진정시켰다. 등을 토닥거려주다가 부드럽게 쓸며 연신 진정하란 말을 속삭여주었다. 은월 또한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눈을 커다랗게 뜨며 깜빡거렸다. 귀를 통해 들려오는, 처음 듣는 그의 약한 소리를 들으며 은월은 검은 마법사의 옷깃을 꽉 쥐었다. 





+) 

우레같은 함성소리도, 주변의 그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바닥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온 몸을 통해 느껴질 뿐, 다른 감각은 죽어버린 듯 작동하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이 자신의 앞에 있는 은월, 그의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일상 생활에서 항상 자고 일어나면 보이는 그런 편안한 얼굴이었다. 고통이라던가 불쾌감 같은 것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은 그런 표정이다. 그 점에 안도하며 검은 마법사는 손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손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 은월의 얼굴에 손을 뻗는 것은 힘들었다. 저번에도 느꼈던, 가슴 속의 응어리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눈 앞이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짐과 동시에 다시 시야가 또렷해진다. 미안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억지로 소리를 내어 미안하단 말을 건넸다. 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계속해서 그 말만을 되풀이한다. 지켜주겠다고, 꼭 미래를 바꿔버리겠다고 약속했건만 그것조차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자신이 이 말을 했을 때의 은월의 표정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아 괴로웠다. 

출혈때문인가. 아니면 눈물 때문인가. 시야가 점차 흐릿해진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눈 앞의 은월 또한 잔상이 점차 흐려졌다. 의식이 점차 깊은 수마로 가라앉는 것이 느껴지며 검은 마법사는 어둠에, 그리고 또다른 빛에 몸을 그대로 맡겼다.
And
전력주제 : 붉음









붉다.
눈은 '붉음'을 받아들이고 뇌는 '불쾌하다'라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온 주변이 붉은 색으로 가득찬 그 자리에서, 은월 그는 혼자 서있었다. 눈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길어버린 앞머리때문에 누군지 못알아볼 것도 같았지만 변하지 않은 아름다운 고동색의 장발덕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머리가 눈을 가려 불편할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그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주변이 붉은 이유가 은월이라는 걸 알리듯 그의 옷에도 붉은 자국과 상처들이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분명 사람 안에서 흐르고 있었을 그 따뜻한 것은 이미 차갑게 식어 피부나 옷에 달라붙은지 오래였다. 참혹한 배경을 바탕으로 서있는 그는 누가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하아.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할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자신의 너클을 손목에서 빼내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툭. 너클은 이미 마찬가지로 붉게 변해버린 잔디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아무것도 차고 있지 않은 그의 팔도 힘없이 늘어졌다. 찍찍 달라붙는 느낌이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짜증나."

얼른 돌아가 다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붉은 빛이 생각보다 너무 강렬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을 꾹 감아도 앞에 아른아른 잔상이 남는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은월은 도통 나아지지 않는 아픈 머리를 잡고 잠시 기댈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었다. 원체 나무가 많은 곳이라, 어렵지 않게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쓰러질듯 말듯 위태롭게 걸어가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희생자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걸어간다. 많은 적들을, 한때는 동료였던 많은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엄청난 마나와 체력을 소모한 탓일까. 아니면 아직도 쓸데없는 감정이 남아있는 탓일까. 속이 답답한 것이 모든 걸 게워내고 싶은 충동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바로 앞에 있는 나무까지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며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이 울렁거렸다. 축지를 이용해 금방 갈 수 있었지만 머리가 아픈 상태에서 그런 체계적인 사고가 나올리 없었다. 결국 얼마 못 가 머리가 띵 하고 울리며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앗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면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무의식중으로 눈을 꾹 감아 곧 온 몸을 엄습할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던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받치더니, 붕 뜨는 기분과 함께 포근하고 따뜻한 곳에 안기는게 느껴졌다. 덕분에 다행히도 잔디밭에 충돌하여 쓰러지는 그런 꼴사나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검은 옷이 시야에 들어옴과 동시에 익숙한 체향이 맡아졌다. 상대방이 누군지 자각하자마자 마음이 평온해지더니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마저 사라지듯 사그러들었다. 싱긋. 저도 모르게 그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 마법사."

"모조리 없앤건가. 무리했군. 니가 쓰러질 정도니."

검은 마법사는 은월을 안았던 팔을 풀고 대신 그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한동안 그의 몸을 살피듯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의 몸이나 옷에 묻은 붉은빛이 은월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너무 길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앞머리를 손으로 정리해준다. 하지만 은월은 그건 싫은지 고개를 저어 다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검은 마법사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가 곧 다시 원래 표정을 되찾았다.

"피곤해.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은월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검은 마법사에게 안겨오며 말했다. 검은 마법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파고드는 모습에 그 또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따뜻한 손길에 은월은 한동안 가만히 그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그는 검은 마법사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마법사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품 속의 어둠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들어온 빛 때문일까. 눈가가 시리며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아 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자, 검은 마법사가 은월의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며 원모양으로 살살 문지르며 달랬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무리한거 아니야. 그저 피곤할 뿐이다."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

부드럽다. 검은 마법사의 눈은 부드러웠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부드러워서일까. 분명 주변과 같은 붉은 색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강렬하지 않으면서 강렬하고, 드세면서도 부드러운. 아아, 같은 붉은 색임에도 이렇게 다를수가. 

"후회하진 않아?"

검은 마법사가 조용히 물어왔다. 은월은 잠시동안 그의 말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싱긋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듯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마치 일부러 보여주려 그런 듯, 은월의 눈을 거의 덮고 있던 앞머리가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그럴리가."

은월의 눈이 예쁘게 휘어지며 웃음을 그려냈다.

마치 옅은 밤하늘에 노을이 남아있는 듯하다. 검은 마법사는 바람 덕에 보여진 은월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바람이 멈추고 도로 앞머리가 내려앉으려 하자  손을 들어 막는다. 이번에는 은월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앞머리를 옆으로 손빗질을 하며 눈이 보이도록 걷어냈다. 자안 속에 붉은 빛이 일렁이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검은 마법사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살짝 움직여 은월의 눈커풀 위에 입술을 떨어뜨린다. 점점 자신과 닮아가는 그를 보니 묘한 흥분감과 안도감이 들어 몸이 떨려왔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 알아주면 좋으련만.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검은 마법사는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을 터뜨린 채 그대로 은월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이제 넌 곧, 나만의—.

붉은 빛이 시야를 감싸며 황홀한 기분에 휩싸였다
And
전력주제 : 책












어두웠다. 예전에 은월이 사용했다던 집은 작고 어두웠다. 햇빛이 없는, 저녁이나 밤이면 한치 앞도 안 보일 것이 분명할 그 작은 곳에서, 촛불 하나로 방을 밝혔을 은월을 생각하니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팬텀 뒤로, 루미너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선 말한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팬텀. 
루미너스가 팬텀에게 좀도둑이라는 별명을 붙이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한 명 정도는 놀라줘야 하건만 지금 그들은 그런 것까지 놀랄 정도의 상황은 못되었다. 그건 당사자인 팬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별말 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 메르세데스는 아란의 망토를 끌어잡았따. 축축한 느낌이 팔과 피부에 감기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루미너스의 오브에 의지하며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구석마다 루미너스가 빛을 두고 나서야 방 안이 밝아졌다. 집 안에 들어가도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입을 열지 않고 묵묵하게 가만히 서있기만 하였다. 집 분위기만큼이나 어두운 공기에 에반은 루미너스 뒤에서 눈치를 살폈다. 그런 에반을 눈치채고 정적은 깬 사람은 아란이었다. 

"자, 이제 가지고 가자. 침대나 책상은 놔둬도 되겠지? 우린 천하장사가 아니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녀의 실없고 어색한 웃음이 들려왔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보려는 아란의 노력이 고마워 다들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조금은 풀어진 듯한 분위기 속에서 팬텀은 속으로 말했다. 물건들 좀 가지고 갈게.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들리지 않을 말을 전했다. 

물건들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은월이 팬텀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원래 성격 자체가 사치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생필품, 여러가지 책, 그리고 프리드의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반지와 푸른색 팬던트. 은월의 물건들은 생각보다 적어 두 상자에 담으니 딱 맞는 양이었다. 아란이 한 상자를, 그리고 다른 한 상자는 루미너스가 들기로 했다. 탁자와 침대밖에 남지 않은 텅 빈 집은 너무 휑해 쓸쓸해보였다. 팬텀은 빈 집을 계속해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팬텀 하고 루미너스가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갈까? 귀환서는 가지고 있지?" 

메르세데스가 귀환서로 보이는 종이를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 미안한데, 먼저 가 있을래? 나 조금 있다가 돌아갈테니까." 

팬텀의 말에 모두들 살짝 당황한 듯 싶었다. 그러자 루미너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도 '어째서' 라는 말을 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아란이 그에게 눈치를 주며 막고 팬텀을 향해 웃어보이며 말했다. 알았어. 너무 늦지는 말라고. 메르세데스와 에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너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팬텀을 노려보고는 주머니에서 귀환서를 꺼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4명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팬텀은 그제서야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촛불을 켰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단 하나뿐인 촛대 위에 거의 다 써가는 촛불이 활활 잘도 타고 있었다. 하지만 촛불 주변이나 밝지, 저 구석구석에는 빛이 닿지 않아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아까 루미너스가 빛을 여러 개 놔뒀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어둡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무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 혼자 있고 싶었다. 차가운 공기가 올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바닥에 스며들어있던 습기가 묻는 것인지 등이 점점 차가워졌다. 쿱쿱한 곰팡이 냄새와 습기냄새 사이로 옅게나마 남아있는 은월 체취를 맡으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하아 하고 내쉬니 서늘한 바깥공기 탓에 입김이 하얗게 변하는게 보였다. 천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촛불색에 비춰져 붉은 빛이 아른거린다. 그 강렬한 빛 사이에도 존재를 알리는 듯, 천장 이곳 저곳에 냄새의 주원인일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습기 때문일까. 아까 물건들을 담을 때 언뜻 나무바닥 사이로 이끼도 본 것 같다. 생각보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더욱 열약한 환경에 팬텀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느 새 그는 페르소나를 벗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가만히 있으니 은월이 느꼈던 고독함, 쓸쓸함, 괴로움이 방 안에 남아 팬텀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문득 갑자기 느껴지는 쓰라림에 그는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분명 자신과 똑같은 이 장소에서,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걸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왔다. 
눈을 감아도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앞에서 아른거렸다. 더 가까이, 자세히 보고싶어 눈을 뜨면 어두침침한 천장만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다시 눈을 감고 스쳐지나가는 얼굴들을 최대한 주의깊게 집중해서 본다. 우리를 바라볼 때의 애틋한 표정, 항상 지어주는 슬픈 미소, 프리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웃으며 맞장구쳐주는 괴로움. 그리고, 항상 저를 향해 지어주던 따뜻한 웃음까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순간 울컥 하며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어쩌면 다신 볼 수 없단 극단적인 생각까지 이르며 참을 수 없이 괴로워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코가 시큰해졌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답답해졌다. 몸을 옆으로 돌려 새우처럼 살짝 허리를 구부리고, 필사적으로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삼킨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아프고 괴로워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어번 쳐야했지만. 

필사적인 팬텀의 노력에도, 눈물이 기어코 한 방울 떨어져 바닥에 톡 떨어진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점점 바닥에 방울이 토독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는 엉엉 어린 아이처럼 울며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울고 싶을 때는 참지 말고 엉엉 우는게 좋아.' 

예전에 은월이 해주었던 말. 그의 말대로, 팬텀은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으며 바닥의 먼지가 묻을 건 생각하지 않으며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 지어주던 미소가, 옆에 가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지어지던 바람냄새가 너무 그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크게 운건 얼마만인지, 아니 아마 생애 처음일 정도로 그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팬텀은 눈가를 닦고 거친 숨을 골랐다. 빨리 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걱정할 터였다. 울어버리다니... 아마 은월이 옆에 있었다면 말 없이 옆에 앉아 같이 있어주었을텐데.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의 생각에 팬텀은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번 했다. 나가는 길에 개울에서 세수라도 하고 가야지 라는 생각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무언가가 반짝 거리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그 반짝거리는 물체는 침대 아래에 있었다. 물건들을 챙길 때는 침대 아래까지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해서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촛불 불빛에 반짝이는 그 물건을 향해 팬텀은 손을 뻗었다. 그 물건은 어렵지 않게 닿았다. 손으로 잡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니 쉽게 제 손에 의하여 끌려나왔다. 

그 물건의 정체는 책이었다. 식탁에 가지고 가 앉아서 살펴보니 보라색 표지의 중간정도 두께의 책이었다. 먼지가 거의 없는 걸로 보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월은 이 책을 썼으리라. 팬텀은 책을 한장한장 넘기다가 이내 몸이 굳어진 듯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귀환서를 써서 에델슈타인에 도착했다. 분명 나올 때는 점심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도착한 이 곳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나. 은월의 집이 있는 곳은 온통 주변이 숲 뿐이어서 시간개념이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걸 보니 당황심이 들었다. 팬텀은 발걸음을 옮기다가 에반과 마주쳤다. 

"어, 팬텀형? 이제 오는거에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에반이 달려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어왔다. 

"아... 미안. 걱정끼쳤군. 다른 애들은?" 

"형 누나들이면 항상 그 곳에 있죠. 들어갈까요?" 

"아니. 아직. 밥 안 먹었지? 애들 데리고 나올래? 밥부터 먹자." 

에? 에반은 팬텀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팬텀의 의외의 말에 당황한 듯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곧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여기 꼭 있어야돼요! 신신당부를 하며 어디론가 뛰어가는 에반의 뒷모습을 보며 팬텀은 프리드를 잠시 떠올렸다. 에반에게는 미안하지만서도 그를 보면 프리드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반은 너무 많이 그와 닮아있었고 이젠 실력까지 늘어 그와 맞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정 반대인 모습이 프리드와 에반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프리드. 나, 어떡해야하지. 
보이지 않는 오랜 친구를 향해 그는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지만 당연하게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에델슈타인이 해방된지 일주일째. 블랙헤븐 이후 많은 걸 얻었다. 에델슈타인은 블랙윙의 해체라는 걸 얻었고 자유를 얻었다. 레지스탕스의 오랜 숙원과 목표를 이루었고 잠시지만 평화도 얻었다. 하지만 잃는 것도 있었다. 오르카 그녀는 자신의 쌍둥이 정령인 스우를 잃었고 팬텀의 크리스탈 가든은 크게 망가졌다. 또한 연합은 주요전력을 잃었고, 그와 동시에 영웅들은 그들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아니, 잃을 위기에 처했다. 

팬텀은 에반과 친구들과 함께 간단히 끼니를 떼웠다. 밥 먹는 도중에 팬텀은 언제 울었냐는 듯 밝게 웃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가끔 능글맞은 말도 해주며 예전의 팬텀으로 돌아간 양 행동했다. 다른 친구들 또한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고 웃었지만 유난히 루미너스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팬텀은 왠지 모를 위화감에 일부러 오버해가며 웃어댔고 그러면 그럴수록 루미너스가 그를 바라보는 표정은 점점 더 묘해졌다. 
밥을 다 먹고 향하는 길은 이미 어둑해져있었다. 평화로운 에델슈타인의 모습에 그들 다섯 명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이야기 주제라고 해봤자, 아란이 일부러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려 자신의 돌아오는 기억들을 말해주는 것 뿐이었지만 말이다. 
달이 떠오르는 듯 하늘 아래쪽이 밝다. 어느 새 늦어버린 시간에 팬텀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손에 들려있는 책을 만지작거린다. 이제 가는게 좋겠다 싶어 팬텀은 동료들에게 눈짓을 해주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나지? 나 이만 가볼게.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해주고는 그대로 뒤돌아 걸어갔다. 얼마 걸어가지 않고, '팬텀!' 하고 메르세데스가 불러세운다. 

"음?" 

"오늘 우린 없어도 돼?" 

"어. 오늘은 나 혼자 있고싶은걸." 

"치. 말은 잘해." 

아란이 팔짱을 끼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약간의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 미소를 알아차린 팬텀이 일부러 과장하며 웃었다. 

"하하하!! 너희들, 날 왜 걱정하냐? 내가 죽기라도 할까봐?" 

"하 참, 어이가 없네. 니가 죽을 애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있거든요?" 

"그럼 됐네요. 얼른 들어가서 자. 오늘은 왠지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아." 

메르세데스의 말에 팬텀이 맞장구를 쳐주며 손사래를 친다. 그의 손짓에 메르세데스와 아란, 에반은 손을 흔들어주며 어딘가 있는 자신들의 숙소(임시거처)를 향해 걸어간다. 하지만 루미너스는, 한동안 계속 팬텀을 빤히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 두 가지 반대되는 색이 교묘하게 잘 어울려 오히려 부담이 컸다. 팬텀은 짜증을 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 왜 그러는데 샌님." 

"내가 뭘. 그냥 니 그 책이 눈에 밟힐 뿐이야." 

"책?" 

팬텀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가 이내 제 손에 들려있는 책을 발견하고는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집에서 나올때 부터 지금까지 손에서 책을 놓고 있지 않았다.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듯이. 이 책은 말이야... 말 하려던 팬텀이 일순 말을 멈추고 루미너스를 바라본다. 

"설명하자면 기네. 좋은 추억만 담겨있는 건 아니라서." 

"....." 

이번에는 루미너스가 침묵했다. 마음을 알 수없는 오드아이로 마치 다른 사람의 마음은 꿰뚫는 것 같아 팬텀은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미너스는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별 말 없이 뒤돌아 친구들이 갔던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팬텀은 그런 루미너스의 뒤를 계속 눈으로 좇다가 자신도 발걸음을 옮겼다. 

루미너스는 계속 걷다 문득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팬텀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항상 봐왔던, 촐랑거리고 능글맞던 분위기가 아닌 어딘가 축 쳐져보이고 힘 없는 그런 분위기다. 그는 아까 낮에, 은월이 살던 집 안에서 크게 울던 팬텀을 떠올렸다. 당연하지만 들으려고 한 의도는 없었다. 그냥 하도 오지 않길래 뭐하길래 늦는거지 싶어 다시 간 것 뿐이었다. 설마 그 곳에서.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처음보는 그의 무너진 모습에 루미너스는 집 밖에 서서 들어가지 못했다. 새삼 팬텀 그에게 은월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은월의 존재가 돌아온 지금 물론 루미너스 자신도 괴로웠지만 그래도 팬텀이 훨씬 더 괴로울 터였다. 그리고 어제 팬텀이, 예전에 은월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무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고 말한 걸 생각해냈다. 모든 걸 잊어버린 것도 모자라 공격까지 했다. 게다가 팬텀과 은월은 수백년 전... 

루미너스는 머리를 세게 저었다.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는게 이유였다. 아무리 저와 팬텀이 죽고 못사는 원수 지간이라도 오랫동안 같이 지낸 동료다. 그가 슬퍼하는건 딱히 자기한테도 좋은 영향은 없었다. 상처받지 않길. 그는 신에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팬텀은 어딘가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보통 빠르기였다. 조급해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복도에 난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그의 발밑을 밝혀주었다. 그 달빛에 팬텀의 하얀 옷이 비춰져 반짝거렸다. 분명 그의 금발에도 빛이 비치면 예쁠것이었지만 지금 팬텀에게는 페르소나를 벗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는 점점 장소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손에 있는 책을 꼭 쥐었다. 

어느 문앞에 도착한 팬텀은 그 문 앞에 붙어있는 종이조각을 확인했다. 은월. 은월의 이름이 적혀있는 걸 계속 보고나서 심호흡을 하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내쉬고, 다시 들이쉬고, 내쉬고.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진 입근육을 손으로 풀었다. 볼을 잡아당기고 문지르며 어느정도 풀리자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그린다. 다시한번 책을 체크하고 옷 매무새를 다듬는게 마치 연인과 첫 데이트를 나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노크를 두번 하고서 손잡이를 돌려당겼다. 그리고는 은월? 하고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은 아까의 그 은월의 집만한 크기였다. 아무런 전기불도 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은 환했다. 아마 달빛이 환해서일거라고 팬텀은 생각했다. 
창가쪽에는 이동식 커튼으로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 커튼은 팬텀의 옷과 마찬가지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만 사실 무슨 색인지는 팬텀도 잘 알지 못했다. 낮에는 커튼을 걷어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밤에만 이렇게 쳐놨기 때문이었다. 푸르고 은빛이 잔잔한 빛이 비춰져, 커튼에는 어떤 사람의 그림자가 투영되고 있었다. 
팬텀은 다가가 커튼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촤르륵 하고 플라스틱 소재의 고리와 쇠막대가 마찰되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반 걷으니, 허리를 베개에 받치고 침대에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은월.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봐도, 그는 시선을 창 밖 달에 고정한 채 돌아보지 않았다. 

"달 보고 있었어? 목 아프겠다." 

팬텀이 그에게 다가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법도 한데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밖을 바라보고 있다. 팬텀은 익숙한 듯 웃으며 은월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뒤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살짝, 아주 잠시 은월이 팬텀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그의 어깨에 기대 본능적으로 파고들었다. 



블랙헤븐 당시, 은월을 살리기 위해 시그너스가 봉인석을 사용하자마자 팬텀은 어떤 이상한 기억에 머리가 아파왔다. 봉인석의 푸른빛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점점 스쳐지나가는 장면들. 누군가가 나의 창고에 들어왔다... 누구지?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그의 존재는 지각하지만 누구인지는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계속 이어들어오는 기억. 루미너스와 나에게 프리드가 화낼거라고 당부하던 사람...
넌 누구야?
나와 루미너스가 싸울때마다 막아주던 사람... 
대체.... 
그리고, 내가 처음 뵙겠습니다 라며 인사하자 같이 웃으며 손잡아주던 사람... 
찡— 하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욱 하고 헛구역질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옆에서 누군가가 괜찮아요? 라고 묻는게 들리는 듯 싶었지만 팬텀은 그가 누군지 조차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적진이었으면 완전 꼼짝없이 당했을 정도로 무방비였다. 서서히 두통이 가고 그에 비례하도록 점점 또렷해지는 그 사람. 팬텀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가득찼다. 뭘 행동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명령이 미처 떨어지기 전에, 가장 먼저 행동한 사람은 메르세데스였다. 그녀는 궁수답게 민첩함으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 

메르세데스가 비명처럼 외친 그의 진짜 이름에 그제서야 팬텀 또한 몸을 움직여 그에게로 달려갈 수 있었다.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은월을 살리기 위해 하나 남은 봉인석을 사용한 시그너스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너무 많은 양의 가스를 마셔버렸고 시간도 꽤 많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봉인석의 힘 때문일까. 다행히 목숨을 잃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명을 유지한 대신 자아를 대신 잃어야했다. 
겔리메르가 발명한 그 초록 가스는 마시면 영혼 없는 꼭두각시가 되는 독가스라고, 헬레나가 말했다. '꼭두각시' 라는 단어에 걸맞게 은월의 상태는 누가 봐도 안쓰러울만큼 심각했다. 2일의 혼수상태 끝에서 깨어난 그는 누가 와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은월의 상태를 지그문트에게서 듣고 직접 그를 만났을 때엔 팬텀은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나오려는걸 꾹 참고 처음 건넨 말은, 그 어떠한 말도 아닌 은월의 진짜 옛이름 한 단어였다. 
팬텀은 자신의 크리스탈가든에서 보살필거라고 했지만 지그문트는 2주동안만 에델슈타인에서 지내기를 권했다. 아직 발작도 일으키고 해독제를 만든다는 명분때문이었다. 또한 은월은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한다고 해서 그가 쓰던 물건을 가지고 와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라고 했다. 오늘 동료들이 은월의 집에 다녀온 것도 그 이유였다. 


"오늘 못와서 미안. 나 기다렸어?" 

"......." 

"그래도 다른 친구들 봤지? 에반 그녀석, 엄청 많이 컸어." 

팬텀은 조곤조곤 시끄럽지 않게 말해왔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에 은월이 눈을 느리게 금벅금벅 감는게 보였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 팬텀은 입술을 살짝 떨어뜨리고는 그의 체향을 맡았다.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이내 얼굴을 떼고 은월의 한쪽 손을 잡았다. 창백한 손이었지만 그대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힘없이 그대로 들어올려지는게 마음이 아파 팬텀은 은월의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 감쌌다. 꼭 잡고 있던 반대손을 가지고 그대로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책 위에 얹었다. 또한 자신의 손도 은월의 손 위에 살며시 얹어놓았다. 제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의 딱딱한 물체에, 은월은 잠시 움찔 하더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책으로 내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손이 반응하는게 느껴져 팬텀은 내심 기뻤다. 

"이 책 기억나? 난 사실 긴가민가 했는데 알고보니 그 책 맞더라. 기억나지?" 

"......." 

팬텀의 말에도 은월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책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달빛에 비친 책은 원래의 자색빛을 감춘 채 밝은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반짝반짝 거리며 표지에 장식되어져있는 쇠장식이 빛난다. 

"이거 말이야, 우리 한권 다 채우기로 했잖아. 아직 3분의 1도 안채워져있더라. 크큭.. 그렇게 열심히 적었는데 말이야." 

".........." 

수백년 전,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기 전 은월은 팬텀에게 책을 건넸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페이지의 책이었다. '우리 여기에 우리한테 있었던 일들을 다 적자. 일기형식으로 말이야. 다 적고 한권 채우고 나서 다시 보면 되게 재밌겠지?' 싱긋 예쁘게 웃으며 말하는 은월에게 팬텀은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면 더 좋은 일만 적힐거라고 말했다. 더 행복하고, 더 줄거운 일들로만 가득할거라고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됬나. 은월은 그 존재가 지워졌고 자신은 그런 은월을 기억하지 못했다. 팬텀은 이 책을, 자신의 보물창고에 저장해놓았던 걸 생각하고는 눈을 꾹 감았다. 책을 발견하고, 자신을 본 은월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예전에 적어놓은 글들을 볼 때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팬텀이 계속 조금씩 말을 걸어봐도 은월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팬텀 또한 기대를 하면 안되었지만 괜스리 기대를 걸어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은월의 손을 꼭 잡고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다시한번 은월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책을 펼쳤다. 

"몇개 읽어줄까? 너랑 나랑 번갈아가면서 쓴게 많아서 되게 재밌을거야." 

은월은 팬텀의 어깨에 기대있는 채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책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걸로 보아 긍정의 의미인 것 같았다. 은월의 무의식 안에서 이 책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큼! 크흠! 음... 어디보자, XX년 4월 12일." 
—이 기절했다. 나와 샌님이 밖에서 잠시 다툴 때 일어난 일이었다. 아란과 메르세데스의 음식을 먹은게 화근이었다. 프리드도 조금 속을 게워내는 걸 보니 둘이서 사이좋게 두 여자의 실험용 쥐가 된 듯 싶다. 그러길래, 내가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야 아무 음식이나 막 주워먹고. 그러면 안돼요 —씨~? 덕분에 나 한시간동안이나 꼬박 걱정했잖아. 

거짓말하지마 팬텀. 아란이랑 메르세데스가 주방으로 가자마자 너랑 루미너스랑 싸우는 척 나가는거봤어. 배신자! 

자신이 적은 일기 아래에 은월의 글씨체로 적혀있는 글은 그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어도 웃기다는 듯 키득키득거리며 웃어댔다. 팬텀은 살짝 은월의 표정을 살피고는 아직 듣고있는 걸 보고선 그를 좀 더 편하게 하도록 자세를 조금 고쳤다. 

"XX년 4월 21일. 날씨 따뜻." 
팬텀이랑 루미너스랑 싸우는 걸 말리느라 꽤 고생했다. 싸운 이유도 정말 어이없다. 팬텀이 루미너스를 샌님 대신 범생이라고 불렀다고 싸웠다. 얘네 둘은 왜 얼굴만 보면 싸우는걸까. 성격이 안맞는건 알겠는데 섞어놓으면 꽤 어울릴 것 같은데. 오늘따라 조금 크게 싸운 듯 싶어 틱틱대는 팬텀을 달래는 데에도 조금 힘들었다. 쳇. 뽀뽀 해주면 풀린다고? 팬텀 니 시커먼 속은 어딜가도 일등일거야. 

결국 해줬으면서. 


팬텀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자신이 아래에 달아놓은 글을 다시 한번 보았다.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은월은 손만 잡아도 엄청나게 부끄러워했다. 잠시 떠오른 옛 생각에 팬텀은 그리움이 사무쳤다. 

"XX년 10월 23일." 
모레는 검은 마법사와의 결전의 날이다. 오늘 아침 프리드와 나, —, 샌님, 아란과 메르세데스와 함께 마지막 작전을 짰다. 난 군단장들을, 특히 스우나 오르카를 막는 역할이다. 문득 든 아리아 생각에 조금 침울해진다. 잘 할 수 있을까 싶어 걱정되는데 —이 옆에서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날 보며 싱긋 웃어주는 그를 향해 나도 웃어보였다. 아, 난 살아야 한다. —을 위해서. 앞으로 있을 즐겁고 행복한 날들을 위해서. 

팬텀은 적힌 책장 중 가장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점점 떨려오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울컥 하고 또다시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손으로 입을 막고 울음을 삼켰다. 그라고 애써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비록 지금은 예전에 생각한 행복한 날은 아니지만." 

"......" 

"계속 적자. 어때? 내가 적을테니까. 괜찮지?" 

"......." 

그때였다. 
한줄기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에 은월의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팬텀의 곱슬머리도 흔들렸다. 바람에 은월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이유는 아마 자신의 옆에 그가 있기 때문일거라고 팬텀은 생각했다. 많이 흩날려 엉켜버린 은월의 긴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주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그의 머리를 손으로 고정시켰다. 얇지만 강한 바람에 팬텀의 손에 있던 책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몇장 넘어간다. 이윽고 바람이 멈추고 그가 책을 향해 시선을 내리자 책 중간페이지 정도에 어떤 글이 적혀있다. 떨리는 눈으로 글씨체를 보니 바로 그, 은월이었다. 팬텀은 두 손으로 책을 들고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OO년 5월 17일. 
여기쯤인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팬텀과 예전에 꽤 많이 적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어디까지 적었는지 잘 모르겠다. 역시나 예전에 나랑 팬텀이 적었던 글들은 다 지워지고 없어져있었다. 랑과 내가 나무에 새겼던 벗의 증표가 사라진 것처럼.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까. 너무 속상하고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싶다. 

OO년 5월 24일 
팬텀이 회의 중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차원을 한 번 넘은 상태라 보물창고 일은 기억나지 않겠지. 순간 긴장되고 떨려 많은 말을 하지 못했지만 가까이 본 것만으로도 만족할래. 더 능글맞아졌더라 팬텀. 

OO년 10월 27일 
내일 블랙헤븐 결전의 날이다. 떨린다. 하지만, 비록 그들은 날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다시 함께 싸우게 된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오늘은 달이 무척이나 밝다. 랑은 잘 지낼까 걱정이다. 호랑이한테 공격당하면 어떡하나. 얼른 일을 정리하면 구슬을 돌려주러 다녀와야지. 미우미우마을에 가면 팬텀은 또 날 잊겠지만 이젠 괜찮다. 내가 팬텀을 기억하니까. 팬텀은 기억 못하겠지만 수번 차원을 넘나들어서 이젠 조금 익숙해진 것 같다.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되는데...아, 내일 난 꽤 중요한 일을 맡는다. 부기님을 탈출시키고 난 이후부터 여제 시그너스는 날 많이 신뢰하는 듯 했고 아마 중요작전에 투입시키겠지. 언제 위험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내일 블랙헤븐 작전에서 나 어쩌면 안 좋은 일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팬텀이 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너무 그리워서. 그리고 너무 걱정되어서 잠이 오질 않아. 예전에도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기 전에 팬텀이 긴장했을 때 내가 어깨에 손 올려주었을 때처럼, 옆에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손 꼭..... 잡고..... 둘이서.... 예전처럼...." 

팬텀은 일기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토독 하고 책 표지에 눈물이 떨어진다. 눈에서도 하나 둘 떨어지던 눈물방울이 이젠 쉴새없이 흘러나와 볼을 흠뻑 적셨다. 은월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고이 곧대로 다 보여주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는 소리없이 입을 꾹 닫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내어 엉엉 울고싶었지만 팬텀은 그러는 대신에 입에 가득 차있는 울음을 꾹꾹 삼키면서 손으로 눈물을 닦는걸 선택했다. 
팬텀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은월을 품에 꼭 안았다. 그의 긴 머리에 얼굴을 묻으며 파고든다. 익숙한 바람냄새를 맡으며 팬텀은 또다시 조금씩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미안해 은월... 이말만을 중얼거린다. 그에 반응하듯 은월은 살짝씩 몸을 떨었다. 
어느샌가 은월 그는, 눈을 꼭 감고서 책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시간은 블랙헤븐 이후.
*플레이어는 은월이고 겔리메르의 독가스를 마시고 원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봉인석 힘때문에 은월 존재도 돌아왔단 설정.

And












손. 나는 손이 좋았다. 뒤쳐질 때 앞서가던 사람들이 내어주는 것도 손이었고, 뒤쳐지는 자에게 내밀어줄 수 있는 것도 손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이 내밀어준 것도 따뜻한 손. 그와 함께 살아갈 이유를 찾아주겠다고 한 그때의 상황을 난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친구들이 나에게 준 관심은 이제 난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남은건, 차디찬 그들의 시선 뿐.










"판테온..?"

약간의 당혹감이 서린 목소리에 앞에 있는 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빨간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꼭 약간의 무시를 담은 것 같았다. 뭐 항상 그의 시선은 좋지는 않았지만.

"왜 거길 가는거지?"

"한번쯤은, 이런 외출도 좋잖아?"

그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보인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기좋은 미소는 아니다. 외출이라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여유를 느끼는 게 조금 어색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이끌리게 되는 그의 웃음에 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만족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봉인되었다가 깨어난 직후여서 수백년이 흘렀다는 감각도 없어 마치 추억들이 어제일 처럼 너무나도 생생한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웠다.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 친구들에게서 들려오는 말들은 모두 나의 정체를 묻는 질문과 경계하는 말 이 두가지 뿐. 게다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존재마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훨씬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나를 유일하게 기억하는건, 나를 이렇게 만든 검은 마법사였다. 그걸 안 나는 스스로 저주스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였다. 내가 죽어도 검은 마법사는 죽지 않는다는 것에 깊은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그가 소멸되면 나도 같이 소멸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살짝 겁이 나기도 해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난 느꼈다. 마음속 깊이, 아주 깊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에 무척이나도 기뻐하고 있었다. 그 기억해주는 대상이 비록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라 해도 기쁨과 동시에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이끌려버린 것이.






"이런 상황에서 나가도 되겠어?"

결국 마음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한동안 내 머리를 만지작 거리던 검은 마법사가 눈동자만을 굴려 나를 쳐다보았다. 보는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로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을 맞받아주며 대답을 재촉했다.

"어차피 사람들이 내가 세상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겠나 싶다만."

살기만 감춘다면 말이지. 그의 말투는 마치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들렸다. 하기야 세상에 알려진 검은 마법사의 외형은 거대하고,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고, 굵은 쇠사슬이 옆에 있는 모습인데다가 그의 하얀마법사 시절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즉 이대로 나가도, 적어도 누가 검은 마법사를 보며 겁을 먹고 도망갈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일부러 그런건지 아님 당연해서 말을 하지 않은건지 그가 나에게 '넌 어차피 잊혀지니까 상관없잖아'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차원을 넘나들때마다 잊혀지고 사라지는 존재 덕분에 딱 군단장 일을 하면 좋을 텐데 그는 굳이 나에게 권유를 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팔짝 뛰며 미쳤냐고 할 소리지만 나는 그래도 그가 나름 생각해준 거라고 느꼈다.

"가서 뭐하려고."

"산책이지. 뭘 더 바래?"

검은 마법사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은 확실히 잘생긴 외모였지만 주변의 어두운 기운과 무표정이 한층 분위기를 가라앉게 보이게 하였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그대로 얼어버렸을 법한 차가운 표정이다.
그의 앞에 쓸려내려온 검은 머리가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나처럼 긴 장발이지만 나보다 훨씬 더 길고 부드러운. 대충 눈어림으로 보니 허리를 조금 넘을 것 같은 길이었다. 

"가기싫어?"

조소를 지으며 검은 마법사가 물어온다. 그의 조소에 살짝 기분이 상한 나는 그를 조금 노려보며 아니거든? 하고 나즈막히 읊조렸다. 그에 검은 마법사는 조소를 지우고, 대신 아까의 차가운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 아주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은 나여서 이럴때마다 항상 속으로 놀라고는 한다. 내가 계속 뾰루퉁한 표정으로 서있자, 검은 마법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귀찮은 군단장 녀석들이 오기 전에 빨리 나가버리자."

심장이 뛸 정도로 나즈막하고 유혹적인 그의 목소리에 나는 결국 그에게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

[... 그렇다고 죽을 이유도 없잖아? 나랑 같이 가자. 찾아줄게, 살아갈 이유.]



따뜻했다. 차가운 내 손과는 달리 그의 손은 굉장이 따뜻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잡았던 손이 상상 이상으로 열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졌지. 이전에 홀로 떠돌아다닐 때 많이 겪어보았던, 그 차갑던 시선과 함정의 구렁텅이가 아닌 진실된 마음과 관심들. 프리드, 그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친구'라는 걸 만들어주었고 살아갈 이유도 찾아주었다. 그리고 난 그런 프리드가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스스로 재물이 되었다. 그 결과는 비록 끔찍하고 잔인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섯갈래길에 도착한 우리들은 차원의 포탈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에 우리들을 힐끗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검은 마법사는 신경쓰지 않는것 같았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기야 건장한 사내 둘이서, 그것도 장발인 남정네들이 나란히 걷는것은 조금 이상해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포털 앞에 서자 검은 마법사가 스스럼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당황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쭈볏거렸다. 이 포털 안으로 들어가면 왠지 검은 마법사마저 나를 잊어버릴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포털인가. 여기서 한발자국 더 움직여 안으로 들어간다면 또 다시 차원을 넘고, 존재가 지워진다는 고통을 맛보는 것이었다. 방금 지나가며 날 흘낏 본 사람들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마치 미우미우 마을 사람들과 헬레나처럼. 그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수도없이 많이 겪었다. 차원을 넘을 때마다 존재가 지워지고 이미 수없이 많은 인사를 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나를 소개하는 것은 정말 괴로웠다. 그게 바로 이 문 때문이었다.
툭. 누군가가 나를 밀치며 포털 안으로 들어간다. 네다섯명의 무리들이 자연스레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부럽다' 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아무런 걱정도 생각도 없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부러웠다. 그러다가 나는, 한동안 계속 서있다가 눈을 꾹 감고 그 포털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파란 하늘과 눈에 선명히 보이는 예쁜 행성. 판테온. 넘었다. 차원을 또다시 넘었다. 이제 저쪽 세상에서 난 또 더이상 존재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주위를 둘러보자 내 옆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마법사가 서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방금 포털 앞에서 한 그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만약, 이마저 나를 잊어버린다면..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하지만 역시 그 걱정은 필요 없다는 걸 알려주는 듯 그가 살짝 투덜댄다. 이럴때마다 가끔 이자가 진정으로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그 검은 마법사가 맞는지 의심이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안도감이 더 컸다.

"미안."

"가자."

검은 마법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이 살짝 휘어지도록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서 마치 누군가가 겹쳐보여 난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검은 옷 사이로 나와있는 새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 손을 잡았다.

따뜻해. 내 손이 차가운건지 그의 손이 뜨거운건지 몰라도 따뜻했다. 꼭 그때, 프리드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 때처럼. 조금 올라오는 감정에 난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놓고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내밀어주는 이 따뜻한 손을
And







편지를 썼다.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정말 이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난생 처음 누군가에게 써보는 글인데다가 그 글 조차도 예전 친우에게서 배운 기초적인 글자라 글씨는 삐뚤삐뚤 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알아보기만 하면 될 것을.

'꼭 만나자.'

단 네 글자만을 종이에 적어 정성스럽게 돌돌돌 말아 작은 빨간 끈으로 묶었다. 나름 외관상 근사해보여 한편으로는 약간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근처 해변을 돌아 얻은 유리병에 바닷물을 반쯤 담궈 손목을 이용해 돌렸다. 안에 담긴 물이 돌아 물속의 작은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그걸 재밌게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그 회오리가 없어지자마자 병을 거꾸로 뒤집어 안에 있는 물을 빼냈다. 처음에 병 벽면에 붙어있던 작은 먼지들이 빠져나가 한껏 더 깨끗해보였다. 병을 탈탈 털어내 안에 있는 물기가 다 빠지도록 했다. 물기를 빼내지 않으면 종이가 다 젖어버릴 테니 말이다.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어 완전히 물을 증발시켜버리고, 정성스레 적은 편지지를 그대로 병에 넣고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완전히 막았다. 그리고는 해변 가까이로 다가가 병을 바다에 띄워보냈다.

괜스리 웃음이 난다. 이런 모습을 니가 본다면 얼마나 웃어댈까.
파도에 의해 점점 멀어져가는 유리병 편지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부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어둑어둑한 저녁, 한적한 해변길. 사람도, 그 흔하디 흔한 몬스터도 없는 아주 조용하고 삭막한 해변에 단 한사람만이 쪼그려 앉아있다. 어쩐지 그의 표정은 매우 슬퍼보이기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하여 다가가서 위로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으나 아쉽게도 그래줄 사람이 있지 않았다. 모래밭에 쪼그려 앉아있던 그 남자는, 그의 갈색의 곱슬머리를 손으로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탁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돌아가려는 듯 기지개를 쭉 펴던 그의 눈에, 반짝이는 어느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저녁놀의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체는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유리제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겨 그 물체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남자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편지...?"

유리병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딱 봐도 편지였다. 작은 실로 묶여져있는 돌돌 말린 종이. 무엇에 이끌린 건진 모르겠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구에 막혀있던 마개를 빼내고 안에 들어있던 종이를 꺼냈다. 두근두근두근.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지 몰랐다. 
남의 편지를 읽는다는 기대감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막연히 두근거린다? 그것도 아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그는 종이를 감싸던 끈을 조심스럽게 끌고 편지지로 추정되는 종이를 펼쳤다.

'..........뭐야.. 백지잖아.'

살짝은 실망한 기색이 들어난 그가 '아무것도' 적혀져있지 않은 그 종이를 들고 이리봤다가 저리봤다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그 종이에는 단 한 글자도 적혀져있지 않은 것이다. 펜 자국도 없어 무언가를 적으려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종이 가운데에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지더니 서서히 없어지며 가운데가 축축해졌다. 그에 당황한 남자가 손을 들어 자기 눈가에 가져다댔다. 선명하게 묻어나오는 물기. 

'어째서..?'

그 종이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그 것을 다시 돌돌돌 말고는 자신이 가지고있던 고무줄로 묶어 유리병에 넣었다. 새로운 마개로 다시 입구를 막고는 바다에 조심스레 띄워보냈다.

"진짜 가려던 사람에게 가기를."

작게 웅얼거리던 그는 만족한다는 듯 작은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서 이미 꽤 어둑해진 하늘을 뒤로하였다.


바다에 두둥실 떠내려가던 그 유리병은, 이젠 미련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파도속으로 깊게 잠들어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