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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파 위, 고양이, 통화음, 지팡이, 소풍. 

벨소리가 지겹게도 울렸다. 지금이 몇번째인지 모를만큼, 지치지도 않는지 쉴새없이 울려댔다. 벨소리가 끊어지면 5초도 안되어 다시 따르릉 거렸고 소파 위에 앉아있던 은월은 안절부절 못하며 애꿎은 고양이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일부러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기는 항상 있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고 문제는 그 다른 곳이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몇번 찾아봤으나 남는건 머리나 손에 남는 자잘한 상처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휴우, 몇년을 산 이 집 구조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해서야. 은월은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따르릉 거리던 전화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20번은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이만큼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기에, 전화를 건 당사자는 분명 여기로... 

띠.띠.띠.띠.띠. 

....왔구만. 

"야, 왜 이리 전화를 안받아!?" 

비밀번호를 누르고 나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다른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은월은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선배! 
남자는 은월을 향해 몇마디 더 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렸다가 그 옆에 지팡이가 없는 걸 보고서 눈을 찌푸렸다. 

"넌 지팡이를 또 어디다가 팔아먹은거야." 

"고의가 아닙니다. 전화 못받아서 죄송해요." 

됐어, 사과하지 마. 그는 짧게 툭 내뱉었다. 남자는 은월의 옆에 자리를 잡고 은월의 무릎에서 갸르릉 거리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소풍이나 가려 했더니. 지팡이 없이는 힘들잖아." 

에? 남자의 말에 놀란 그가 탄성을 내뱉었다. 다른 단어에 놀란게 아니고, '소풍' 이라는 말 때문에. 그에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어차피 은월에겐 보이지 않을 터였다. 

"아니요, 가요." 

"괜찮겠어?" 

그가 걱정스런 말투로 은월에게 말했다. 은월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세게 끄덕인다. 

"차피 선배가 옆에 있을텐데 지팡이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2.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이었다. 깊은 고동이 울려퍼졌다.] 


남자답지 않은 긴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그는 나무에 몸을 기댔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살랑거렸다. 고개를 위로 지켜들자 자신의 시야에 꽉 찰 만큼 나무는 크고 넓었다. 마구잡이로 날리는 머리카락이 꽤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딱히 저지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남자는 나무를 담던 눈을 돌려 아래로 내리꽂았다.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긴 머리를 소유한 남자였다. 은월. 그의 이름인 듯한 말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 마음에 대응해 준 사람은 바로 은월이었다. 그렇기에 별 일 없을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 은월 또한 자신과 마음이 같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자신과 함께 지내고 몸을 섞기 시작한 날부터 은월은 가면 갈수록 불안해하고 초조해했다. 눈물이 늘었고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자신의 앞에서는 아닌 척 밝게 웃지만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나름 유추해볼 수 있는 바로는, 잠꼬대를 할 때마다 그 옛날 용의 마법사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보아 그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미안함을 느끼거나. 아무튼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하지만 둘 중 어떤 이유든지 간에 마음이 불편한 건 변함이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은 많은 별 덕분에 완전한 검은색이 아닌, 짙은 남색과 보라색이 섞여있는 색이었다. 어디서든 완전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건가. 어둠이 있으면 그와 동시에 빛도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언젠가 은월이 슬쩍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다운 생각인 것 같아 괜스리 웃음이 나왔다.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내려 은월을 쳐다보았다. 문득 그의 보라색 자안에 별이 담기면 얼마나 예쁠까, 꼭 밤하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곤히 자고있는 그의 뺨에 손을 올려놓고 조심스레 쓸었다. 손가락을 통해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자신의 손길 때문인지 은월이 몸을 뒤척이며 기지개를 핀다. 눈을 살짝 뜨자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월은 다시금 눈을 감으며 남자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잘도 잔다. 그는 웃음기 담긴 얼굴로 말하며 얼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은월이 배시시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월의 미소에, 남자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게 느껴졌다. 밤이라서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는게 다행이었다. 만약 들켰다면 그는 일주일 내내 은월의 놀림이 될 게 뻔했으니까. 이유를 알 리 없는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남자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아아, 역시. 넌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소리없는 말의 고동이 깊게 울려퍼졌다. 




3. 멈춰버린 시간/샴페인/조금만 더 
*아주 약간의 수위 조심해주세요 


샴페인인데도 불구하고, 은월은 정신없는 머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분명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샴페인은 그다지 도수가 높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고작 3잔 마시고 이 모양이라니! 열이 올라 붉어졌을 얼굴을 손으로 감싸 식히면서,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욱. 골이 흔들리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흔든건 큰 실수였다. 

"괜찮아?" 

은월의 앞에 앉아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있던 다른 남자가 물어왔다. 이 남자는 취하지도 않나. 은월은 자신만 이런게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앞에서는 굴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줘요." 

"무리하면 안될텐데." 

"상관 없으니까, 조금만 더." 







젠자아앙!!! 은월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신을 원망했다. 저 남자에게는 외모, 재력, 권력, 능력까지 다 줘놓고서 정작 저에게는 주량마저 주지 않은겁니까!?!? 

"더러운 세상..." 

애꿎은 세상탓만 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가가 당기고 시야가 어질어질한게 딱 취기가 올라오는 증상이다. 하... 서럽다. 은월은 빨리 씻고 자고싶은 생각 뿐이었다. 
남자가 샴페인이 든 잔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왔다. 모처럼 네 승진 축하파틴데 벌써 끝나면 아쉽잖아. 취기도 안오르는건지 여유있는 표정을 지으며 한 모금 들이키는 모습이 어찌나 섹시한지, 은월은 정신 없는 그 와중에도 그의 모습을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술 때문인지 얼굴에 열도 빨리 달아오르는 듯 했다. 그런 얼굴을 보여주긴 싫어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뭘 고갤 돌려? 나 봐." 

"싫은데요." 

"어쭈?" 

이게 상사의 말을 거부해? 남자는 낮게 웃으며 샴페인이 든 잔을 들고 은월의 옆에 착석했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한 모금 가볍게 머금은 뒤, 은월의 고개를 손으로 돌려 그대로 입맞췄다. 

은월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입을 통해 들어오는 톡 쏘는 샴페인 맛에 가뜩이나 달아올랐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달작지근하면서도 톡 튀는 샴페인 맛과, 곧 이어 맞물리는 말캉한 살덩어리가 정신을 더 어지럽게 헤집었다. 농도 짙은 입맞춤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은월은 입을 떼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한 손으로 은월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키스하고 싶어.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는 싱긋 웃으며 입맞췄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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